I. 들어가는 말
시대나 장소를 불문한 어떤 사회든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처럼 갈등은 통상적 사회 현상의 하나이기에, 많은 학자들이 그것을 사회생활의 불가결한 요소로 받아들이자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갈등이 사회체계의 유지 존속에 기여한다고 주장한 기능적 갈등론자에서 그것이 인류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었다는 맑스주의 갈등론자에 이르는 대부분 갈등이론가들이 사회 갈등의 보편성과 불가피성을 피력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임계점을 넘어서는 과도한 갈등은 사회의 존립이나 안정을 위협하는 심각한 위협 요소로 인식되어, 제도 개선에서 의식 개혁에 걸친 다양한 갈등 해소 방안들이 모색되어 왔다.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압축적 근대화, 파당적 통치체제, 폐쇄적 문화 환경에서 다양한 형태의 갈등이 생성되어 왔다. 냉전구도 하의 해방공간 시절부터 존속해 온 이념갈등, 무리한 산업화 정책의 추진으로 인한 계층갈등이나 지역갈등, 유교적 가부장제 하에서 증식되어온 젠더갈등이나 세대갈등 등이 대표적 사례들이다. 따라서 한국사회는 ‘갈등공화국’으로 불려 왔고, 갈등 해소를 위한 사회통합 방안들이 지속적으로 모색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사회갈등의 배후 요인에 해당하는 사회불안, 갈등의 화근인 사회격차, 그 부정적 결과로서의 사회갈등 및 갈등 해소를 위한 사회통합이라는 네 가지 논제를 중심으로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황을 진단하면서, 화합적 통합의 상태로 향진할 수 있는 방안을 논구해 보고자 한다.
Ⅱ. 사회불안
한국사회에서 불안이 시대적 화두로 대두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경제성장에 주력하던 1960-70년대에는 산업화에 박차를 가해 빈곤 상태를 탈피하자는 것이 시대적 과제였고, 억압적인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반발이 고조된 1980-90년대에는 자율성 회복이 초미의 국민적 관심사였다. 그러나 세계화나 제도적 유연화 등으로 사회적 불확실성이 고조된 근자에 이르러 불안이 공적 담론의 핵심 소재로 대두하고 있다(김문조·박형준, 2012).
사회 불안은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각처에서 목도되는 보편적 문제꺼리의 하나에 속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불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을 함유한다. 첫째는, 불안이 생애주기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면서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10대 청소년기에는 명문대학 진학을 위한 학업불안, 20∼30대 청장년기에는 번듯한 일자리 및 보금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취업 및 주거 불안, 30∼40대 중·장년기에는 고용 및 승진 불안, 40대 이후부터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는 건강이나 생계 문제를 중심으로 한 노후 불안이 이어진다. 둘째는, 전통적 가족주의의 유제로 개인의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부모 및 직계자녀로 이루어진 이른바 핵가족의 경우를 놓고 볼 때, 초중고교 재학생이 있는 부부는 자신과 직결된 불안 외에 자녀들의 학업 불안이 중첩된 다중적 불안에 시달리며, 그런 상태는 자녀가 대학을 입학할 때까지 지속된다. 여기에 노부모까지 생존해 계시다면 그들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나 노환에 대한 염려로 부가적 불안이 가중된다. 이처럼 불안이 가족 전체의 중층적 고뇌인 까닭에 개인의 불안이 두세 배로 증폭되고 있다. 셋째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배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탈(脫)성장 시대에 접어들어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이 불확실성으로 매몰되면서 미래의 삶에 대한 예기적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여기에 세계 최하위의 출산력으로 인한 생산적 인구의 감소, 가족제도나 가족의식의 변화로 인한 보양육 기능의 약화, 급진적 고령화 시대에 상응한 복지체제의 미비 등이 가세되어, 지난날의 “압축적 성장 사회”가 “압축적 불안 사회”로 돌변하고 있다(김문조, 2019).
불안은 주위 사람이나 사회에 대한 경계심이나 불신감을 조장해 갈등을 부추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학교폭력, 가족해체, 노사갈등, 그리고 이른바 ‘갑을(甲乙) 갈등’이 만연하는 것은 신뢰와 연대의 맹아라고 할 수 있는 의식적 안정감이 유실되어가고 있다는 방증인 것이다. 파시즘 등장이라는 세계사의 퇴행적 사태로부터 추론할 수 있듯, 불안한 개인들은 편협한 급단주의자로 전락해 차이를 용인하려 들지 않고, 사회한 분쟁을 격화시키는 배후 요인으로 작동해 사회갈등의 증폭시킨다.
Ⅲ. 단절적 격차로서의 사회 양극화
사회적 지위의 위계적 차이인 사회격차가 화합적 삶의 저해 요소가 된다는 견해는 사회사상가들의 주장에서는 물론 경험적 분석가들의 연구결과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다. 차이는 격차의 모태적 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 차이가 수직적·위계적 형태를 취할 때 격차로 지칭된다. 따라서 사회격차는 곧 사회적 불평등과 동격의 개념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근자에 첨예한 쟁점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것이 사회격차의 독특한 형태에 속하는 양극화(polarization)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제기하고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카를 카우스키 간의 궁핍화 논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양극화 논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 국면에 들어설 때마다 비판적 담론에 등장한 지구적 차원의 화두이다(Krugman, 2008; Piketty, 2013). 하지만 우리사회의 양극화는 그러한 보편적 담론에서 거론되는 수준을 넘어선 긴박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경제 정의와는 상반된 엄청난 불로소득 격차에서 발원해, 주거 및 교육공간의 격차를 통해 사회적 차원으로 외연되고, 소비생활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차원으로 확산되고 있는 양극화가 성취동기와 직결된 의식적 차원으로 비화함으로써 사회갈등을 격화시키고 있다(김문조, 2008).
이러한 양상은 객관적 측면을 넘어선 주관적 차원에서 보다 여실히 드러난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라고 불리던 1980년대 말에 70%대까지 치솟았던 우리 사회의 중산층 의식이 1997년 환란 이후 급격히 하락, 최근에는 자신을 ‘저소득층’으로 규정하는 사람이 ‘중산층’이라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을 앞지르고 있는 실정이다. 성장시대에 60%대를 오르내리던 한국사회의 중산층은 낙관적 미래관과 높은 사회적 성취동기를 지닌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의식적으로 상류층 성원들과 대동소이한 존재였다. 따라서 <그림 1>에서 보듯, IMF 환란 이전의 성장기 한국사회의 의식적 계층구조는 상층과 중산층을 망라한 다수의 열망계급(aspiration class)과 거듭된 실패로 의기소침한 소수 낙망계급(disappointment class)이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위아래층에 동거하는 “한 지붕 두 가족”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계급구조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자본을 독차지한 상류계급에 귀속되고자 하는 극소수 야망계급(ambitious class)과 언제 일자리를 상실할지 몰라 상시적 불안감에 시달리는 종다수 절망계급(despairing class)으로 극명히 구분되는 이원적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김문조, 2019).
또 <그림 1>의 화살표들의 방향으로 짐작할 수 있듯, 성장시대에는 낙망계급이 상향이동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열망계급과 동일한 의식적 정향을 공유했지만, 환란 이후의 탈성장 시대에 이르러 다수를 점하게 된 절망계급은 임금이나 자산 수준과 같은 경제적 측면에서는 물론이요, 주거, 자녀 교육 및 생활양식 등 여타 국면에서도 우월한 입장을 독점하려는 열망계급과 대립각을 세움으로써 양대 계급이 배타적 관계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Ⅳ. 사회갈등
서구사회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200여 년 동안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이 비교적 자생적이자 완만한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 따라서 산업화에 수반된 사회 문제나 갈등들에 여유를 갖고 대처하면서 파국적 상황을 회피하거나 응전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었으나, 한국사회는 급속한 경제성장이나 구조적 변화로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갈등 상황에 직면한 경우가 많다. 특히 장기간의 권위주의 통치체제 하에서 내연되어온 계층갈등은 90년대 이후 사회 민주화에 따른 권익의식의 향상과 삶의 질 추구 등에 힘입어 다방면으로 분출되었을 뿐 아니라, 그 규모나 정도도 증폭되어 왔다. 더구나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거나 관철시키기 위한 참여적 행위가 고취되어, 갈등은 요즘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정의적 속성(defining characteristics)’으로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계급적 차등화 및 사회관계의 단절화로 대결적 성격을 더해가는 한국사회의 갈등은 지난날의 경제적 성취나 사회발전 성과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악성 기류를 함유하고 있으므로 예의주시할 필요성이 있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지난날의 생활체험에서 발원한 불신, 지금의 일상사에서 제기되는 불만 및 미래적 삶에 대한 불안이라는 이른바 ‘3불’로 지칭되는 심적 고통으로 미시적 갈등이 거대 갈등으로 증폭되는 ‘나비효과’를 초래할 개연성이 이례적으로 높다(이재열, 2001). 따라서 국력소모적인 사회적 마찰과 대립을 극복함으로써 사회발전적 에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갈등 조정 및 관리가 화급한 시대적 과업으로 대두하고 있다. 권력이나 자산의 점유와 직결된 정치경제적 갈등만이라면 분배구조의 혁신으로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가세된 오늘날 한국사회의 갈등은 많고 없음이라는 소유의 문제를 넘어선 존재 가치의 문제로 파급되고 있는 만큼, 자산 재분배나 사회 안전망 확충과 같은 공리적 차원을 넘어선 포괄적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Ⅴ. 갈등 시대의 사회통합 원리
갈등의 원천을 이루는 사회 불평등은 사회구조적 복잡성에 상응해 다종다기(多種多岐)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그런 과정에서 부나 권력과 같은 정치경제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존재 이유나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상징적 요소들이 가세하게 된다. 즉, 소비주의, 지역감정, 세대관, 성 의식 등 다양한 사고들이 점착된 오늘날 사회갈등에는 생활기회(life chance)의 향상에 대한 기대는 물론이요, 적정 생활양식(lifestyle)의 향유에 대한 열망이 착종되어가고 있다(김문조, 2008).
상징적 가치에 대한 욕구는 물적 자산에 대한 소유욕과는 여러 점에서 대비된다. 첫째, 물적 자산은 계량적 산정이 가능하나, 상징적 자산은 그렇지 못해 적정 수준을 가늠하기가 용이치 않다. 둘째, 상징적 자산이란 주로 타인과의 상호작용 상황에서 발현하는데, 적정선에 대한 기준이 개인마다 다를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자신이 소신마저 불분명해 합리적 조정이나 타협이 난망한 경우가 많다. 셋째, 배분적 원리에 의해 우열이 주어지는 물적 자산과 달리 상징적 자산은 기본적으로 차별적 원리에 의해 평가된다는 점이다.
구조적 불평등에 기인한 사회갈등은 일찍이 막스 베버가 개념화한 생활기회(life chance)의 높낮이를 척도로 한 이해갈등(interest conflict)의 전형에 속한다. 그러나 생활기회의 격차가 취향이나 가치관 등을 포함한 생활양식(lifestyle)의 차원으로 확장되면 사회 갈등은 상류-하류(highbrow–lowbrow) 의식을 담지한 정체성 갈등(identity conflict)의 성격을 띠게 된다. 한동안 이해갈등은 주로 자원 재분배를 주축으로 한 분배 투쟁, 정체성 갈등은 동등성 요구를 내세우는 인정 투쟁에 상응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법철학자이자 사회사상가인 낸시 프레이저(N. Fraser)는 분배의 쟁점과 인정의 쟁점은 그 어느 것도 상대 범주에 귀속시킬 수 없는 독자적 속성을 지닌 것이어서 개념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반면, 그러한 문제를 둘러싼 프레이저와의 논쟁 과정에서 비판이론가 악셀 호네트(A. Honneth)는 분배 갈등에 대한 논의가 독자적 축을 형성하고 있음에 동의하면서도, 인정 갈등은 분배 갈등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임을 역설한다(Fraser et al., 2003).
그러나 현실세계에서의 사회갈등은 양대 차원에서 동시적으로 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차등적 구조에 대한 불만에서 촉발하는 경제적 차원의 사회갈등은 왕왕 무시라는 부정적 반응을 통해 고조되는데, 여기에 자신의 존재 가치마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객관적 난관을 감수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의지가 무산되고 만다. 구조적 불평등이 무시를 낳고, 무시가 다시 외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심성적 원천으로 작동하는 정적 환류(positive feedback) 효과가 역력한 한국사회에서는 차등과 배제가 분립적 형태가 아닌 중첩적 형태로 발현하는 것이 통례이다.
한편, 분배론 및 인정론에 속하지 않는 별도 차원으로의 사회통합 원리로 부연할 수 있는 것이 응보론(retributive logic)이다.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한 응보론의 기원을 따지자면, 전술한 복지적 접근이나 포용적 접근보다 연조가 깊다. 더구나 자유경쟁에 의한 질서형성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원리는 연대, 포용, 관용보다는 적대, 배제, 엄단과 같은 징계적 처벌에 의거한 질서유지를 선호해 온 경우가 많다. 신자유주의적 사회체제 하에서 불량품에 해당하는 잉여 인간에 대한 처벌의 목적이 그들에 대한 재활용이나 복귀보다 축출에 있다는 배제론도 응보론 범주에 귀속시킬 수 있다(Bauman, 2004).
따라서 사회갈등의 해소를 위한 사회통합의 기본 원리 및 실천 방안은 일단 응보적 정의에 의거한 징벌적 접근, 분배적 정의에 의거한 복지적 접근, 그리고 인정적 정의에 의거한 포용적 접근이라는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징벌적 접근은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한 법적 처벌이라는 법적 제제 효과(deterrence effect)에 기초한 사회통합 방안으로 법치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복지적 접근은 안정적 직업기회나 연금·복지제도와 같은 사회 안전망 강화를 통해 어려운 여건에 처하면 안정될 때까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생활기회의 개선을 목표로 한 사회통합 방안이며, 포용적 접근은 개개인이 유의미한 사회적 존재임을 인정함으로써 공존공영을 향한 생활여건의 조성을 목표로 하는 사회통합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날로 심화되는 갈등 해소를 위해서는 심성적 차원을 포함한 보다 원천적인 혁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간단없이 제기되어 왔다. 즉, 전술한 징벌론, 분배론 및 인정론을 넘어선 새로운 갈등 극복을 위한 제안을 뜻하는 것으로, 그 대표적인 것이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에 의한 화해적 접근(reconciliation approach)이다(김문조, 2019).
Ⅵ. 대안적 사회통합론의 요청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갈등 해소 방안으로 가장 크게 의존해 온 방안은 통제나 조정 위주의 접근이었다. 하지만 대인관계를 회복시켜 국민 전체의 번영을 기하기 위해서는 사회체계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필히 강화되어야 한다(Keck & Sakdapolrak, 2013). 사회적 배제를 야기하는 조절적 방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회적 패자를 양산한다. 따라서 금제나 배제의 위협으로는 소기의 사회통합 효과를 기하기 어렵다. 더구나 사회 특권층의 반사회적 행태에 대한 반감이 누적되어 법적 처벌의 수위를 넘어선 초법적(supra-legal) 응징에 대한 대중적 욕구가 이례적으로 강한 것이 한국사회의 특성임을 감안할 때, 법리에 의거한 징벌적 접근이나 경제적 보상을 내세운 복지적 접근이 아닌 회복적 정의에 입각한 화해적 접근의 보강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사회지출의 수준이 높고 사회복지의 탈(脫)상품화 정도가 높은 복지 선진국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의 사회적 만족도가 여타 사회에 사는 국민들의 그것보다 높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Sustainable Development Solutions Network, 2020). 사회통합은 본원적으로 특정 부류에 국한된 과제라기보다 전체 사회구성원들의 정신적 건강성과 관계가 깊다. 울분과 원한으로 고착되어온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 사회통합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 주어져야 함은 물론이나, 보다 원천적으로는 보편적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인간 존엄성 회복 및 심성적 결속을 향한 심성 함양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분노하라”는 구호는 요즘 지구 어느 곳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상시적 언표인 만큼, 노기(怒氣)는 이 땅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중동, 중남미, 유럽에도 있고, 심지어 자본주의 중심국인 미국의 금융 중심지 월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Hessel, 2010). 하지만 자신이 아닌 타자, 또 내부가 아닌 외부를 지향하는 전가 양식과 표출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최근 우리 사회의 분노는 피해자적 열패감을 동반한 울분으로 특화되고 있다. 적층식(積層式)으로 흉중에 겹겹이 쌓이는 누적적 형태를 취하는 한국사회 특유의 울분은 쉽게 제어하기 힘들고, 개개인의 심성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며, 폭발력도 강하다. 실제로 한국사회에서는 잘못 건드리면 노기를 분출하는 격분형 인간과 마주치는 경우가 많다. 포화상태로 누적된 울분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딱히 남녀간 구분도 없고, 청장년층은 물론 중노년층에도 있으며, 직종이나 직급과 무관하게 각계각층에 널리 산재해 있다.
적대적 울분을 동반한 사회갈등을 초기에 제어하지 못하고 임계점을 넘기게 되면 갈등이 통제 불가한 상태로 치달아 극심한 사회적 손실을 초래하게 된다. 이 때, 갈등의 배경 요인 및 원천 요인에 해당하는 사회적 불안과 사회적 격차, 또 그 촉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불공정성이 혁파되어야 할 시대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만큼, 이러한 부정적 요소들을 긍정적 방향으로 역전시켜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사회통합 방안의 전면적 혁신이 절실하다.
Ⅶ. 넬슨 만델라의 용서와 화해
“과거사를 다루는 정책이 지난날의 과오를 징벌하려는 목적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들의 권리와 당대의 사회적 요구를 동시적으로 포용하는 담대하고 창의적인 전략이 바람직하다.” 이 같은 신념에서 출원한 넬슨 만델라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약 340여년에 걸친 남아공화국의 내국적 갈등을 딛고 새 출발을 하는데 막중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로부터 인종에 근거한 고착적 불평등 구도를 벗어나 발언되지 못했던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결의가 도출되었는데, 이는 참담한 과거사가 행위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 잘못된 사회체제나 지배구조 때문이라는 각성의 소산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확고한 의지를 통해 만델라는 화합적 미래를 만들어가자는 국민 대다수의 동의를 이끌어내어 새로운 공화국 건설과 발전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만델라, 2006).
투옥 전까지는 대단히 호전적인 인물이었던 만델라는 27년간의 옥중 생활에서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점을 깊이 깨닫게 되면서 정적이었던 사람들을 찾아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화해가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보여주는 것임을 확신한 그는 공멸 회피를 위한 진지한 타협과 조정, 새로운 통치질서의 확립을 위한 개각과 법안 개정을 추진해 모든 인종이 고루 참여하는 통합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만델라, 2006). 이처럼 지난한 역정에서 생성된 화해와 용서의 정신은 지난날 우리 현대사에 출현한 어떤 사건이나 결실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극적이고 감동적인 결과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지역이 다르고. 역사적 체험도 다를 뿐 아니라, 사람도 다르다. 하지만 현저한 여건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멀고먼 아프리카대륙 최남단의 남아공화국 체험은 요즘 우리 대한민국에 복기할 가치가 크다고 본다. 얼핏 보면 만델라의 나라 남아공의 사회통합은 소통, 이해, 관용 및 배려와 같은 상생적 행위를 통해 사회적으로 차별받아온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입지를 제공하고자 진력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널리 회자되고 있는 그러한 공동체적 덕목들은 깊은 단절의 골을 경계로 서로 호각세를 견지하는 심각한 대치국면에서는 통합의 필요 요소일지언정 결코 그 충분 요소가 되지 못한다는 점을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만델라의 지도력이 돋보인 남아공화국 사례로부터 절감할 수 있다. 이해, 관용, 배려와 같은 조처들은 타자를 위한 이타적 행위임에 분명하나, “나는 나, 너는 너”라는 피아관(彼我觀)관을 고수하는 약한 이타주의(weak altruism)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화해와 용서를 통한 치유를 전제로 하는 만델라의 사회통합론은 피아간 융합(融合)을 지향하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이타심이 발동해야 “사회다운 사회”로 도약할 수 있는 통합사회로의 이행이 촉진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김문조, 2019).
용서와 화해를 통한 치유는 통상적 교감을 넘어선 강한 공감대 하에서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참회를 통해 맺힌 마음을 풀어 정신적 상처를 아물게 하는 고단위 처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경계심이나 혐오감이 팽배하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공감적 소통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진작시키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동정적 이타심을 넘어선 호혜적 동반자 의식을 통해 달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 때,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건의 하나가 마음의 응어리를 푸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앞장 서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선제성이다. 누가 선제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들이 병립한다. 갖춘 사람이나 강자가 먼저 포용적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객관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열등한 입장에 있는 약자나 피해자가 먼저 손길을 내밀어야 해원(解寃)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견해도 엄존한다. 이들 사이에 다양한 중도적 주장들이 존재하는데, 모두가 다양한 체험과 맥락 하에서 도출된 가설들인 만큼, 조건을 따지지 않고 정설 여부를 확언하기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단,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누구든 선제적 물꼬를 터야 화해적 통합을 향한 대화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인데, 넬슨 만델라의 사례의 경우 참담한 고초를 치른 지도자의 해량적 자세가 결정적이었다.
Ⅷ. 화해적 통합론의 의의
사회통합은 사회체계의 위기를 초래하는 갈등을 제어할 수 있는 사회구성원들의 연대나 결속력 강화를 본령으로 한다. 안정적 삶을 보장하는 화합적 사회통합을 일궈내려면 갈등을 은폐하거나 통제하려는 권위주의 시절의 갈등관리 양식을 탈피해 갈등의 원천이나 촉진 요소를 적발하고 시정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는 종전에 크게 의존해 온 사회통합론들의 한계를 살펴, 그들을 초극할 수 있는 대안적 사회통합의 경로를 탐색해 보도록 하자(김문조, 2019).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 갈등 대처에 가장 애호되어온 방식은 ‘막자’에 해당하는 강력한 처벌위주 정책, 말하자면 무관용 정책 쪽이 가까웠다. 그러나 인권이나 공동체적 가치를 높여나가기 위해서는 응징사회를 재생 가능성이 높은 회복탄력적 상태(resilient state)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사회적 격리나 배제를 근간으로 하는 징벌적 접근은 자포자기적인 패배자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처벌 위협으로는 법적 억제(deterrence) 효과는 물론이요 예방적 효과도 크게 기대할 수 없다. 지금까지 국가가 선호해 온 강력한 대책의 부작용들로부터 직감할 수 있듯, 응징적 방안은 사회구성원들의 관계를 악화시켜 공동체의 와해를 초래할 때가 많다. 여기에 특권층의 전횡이나 불공정 행위에 대한 반감으로 초법적 응징에 대한 선호도가 이례적으로 높은 우리 사회의 특수성까지 감안한다면, 대중적 인기몰이를 동원한 엄벌주의적 조처는 사법자제(judicial self-restraint) 정신에 의해 가급적 억제될 필요가 있다.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용어로부터 유추할 수 있듯, 사회적으로 우대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러한 혜택을 자신이 몸 담고 사는 사회의 음덕으로 받아들여 사회에 대한 보상적 책무의식을 쌓아나가게 된다. 노블레스의 어원은 닭의 벼슬, 오블리제의 그것은 달걀노른자라고 한다. 따라서 복합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에는 닭이 자신의 벼슬을 자랑하지 않고 알을 낳아 주변 사람들에 혜택을 베풀자는 시혜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 이념의 확산과 더불어 시혜적 보상보다 제도화된 형태의 보상이 사회통합에 긴요하다는 인식이 파급되면서, 복지 혜택을 누리는 수혜층이든, 그에 해당하지 않은 사람들이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은 나눔이나 베풂과 같은 이타적 덕목을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공적 책무로 여기게 된다. 그 결과, 복지체제의 강화를 통한 사회통합은 사회적 위화감이라는 뜻하지 않은 복병과 마주치게 된다.
사회갈등의 상처나 후유증은 시간이 가면서 호전되거나 잊히지 않고 악화되는 경우가 있다. 사회갈등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고자 할 때 갈등의 배경 요소나 원인을 밝히고, 갈등의 양상과 과정을 분석하여 폐해에 대한 책임을 규명하려는 것은 바로 악성 갈등의 폐해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책임 규명 과정에서 전가(attribution) 논리에 휘둘릴 수 있다는 위험성이 포섭적 통합론의 가장 큰 취약점으로 꼽힌다.
결과로부터 원인이나 과정을 유추하려는 전가적 사고는 갈등의 본질에 관한 규명보다 갈등을 누군가가 책임져야 할 사회악으로 치부함으로써 포섭적 통합을 저해할 개연성이 높다. 과거사에 대한 과도한 집착, 즉 지난날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 추궁이나 응징에 천착하는 이러한 처사는 갈등사회의 구성원들을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해 갈등을 조정 불가한 상태로 몰고 가는 경우가 많다. 사회통합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협력이나 화합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이런 행태는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의 갈등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재단함으로써 갈등 현황이나 동학을 곡해할 위험성이 크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징벌적 규제론이나 복지사회론은 물론이요, 여태 한국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포용적 통합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각이나 실천적 대안의 모색이 절실하다. 응보적 원리에 의거한 징벌론이나 공리적 원리에 기반한 복지사회론은 인적 유대를 약화시켜 사회 분열을 조장할 소지가 크다. 또 그로 인한 대립과 갈등이 새로운 분쟁을 야기함으로써 갈등을 확대재생산하기도 한다. 따라서 모종의 공동체적 결속에 기반한 대안적 사회통합 방안을 도출하는 일이 적실한 대응책으로 대두하는 바, 그 유력한 대안으로 기대되는 것이 회복적 원리에 준거한 화해적 접근이다(McCold & Wachtel, 2003).
오늘날 한국인의 생활환경은 통상적 의미의 ‘각축’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전투적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생활현실’이 ‘생활전선’, ‘경쟁’이 ‘사투,’ 또 ’경쟁자‘가 생사를 결하는 ‘적’이요, ‘성공’이 ‘승리’, ‘실패’가 ‘패배’라는 용어로 환치되어가는 언표상의 변화가 그러한 진단을 뒷받침하는 증좌라 할 수 있다.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는 부상자가 있기 마련인데, 그들의 상처는 대부분 ‘사회적 외상 후 스트레스(social PTSD)’라는 범주로 통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김문조·김남옥, 2017).
사회통합을 향한 갈등 해소의 관건은 바로 그러한 만성적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있다고 하겠는데, 그러한 방향으로의 발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 Freud)의 정신분석학과 알프레트 아들러(A. Adler)의 심리학을 접목해 로고테라피(logotherapy; 의미치료)라는 치유법을 제안한 빅터 프랭클(V. Frankel)의 논지에서 찾을 수 있다(Frankel, 1946). 로고테라피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 미래를 바라보며 삶에 충실하라는 희망을 불어넣고 격려하는 사회심리적 요법”이다. 이것이 바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에 기초한 갈등 극복 방안인 화해적 접근(reconciliation approach)에 부합하는 실천 방안으로, 환란 이후 지금에 이르는 20여년이라는 오랜 시일에 응축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최적의 해법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넬슨 만델라의 화해적 국정 운영은 바로 그 구체적 실현 사례인 것이다.
“눈에 보이고 의사가 고칠 수 있는 상처보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훨씬 아픕니다. 남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은 쓸데없이 잔인한 운명으로 고통 받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라는 만델라의 고백은 곧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과 상통하는 것으로(Benson, 1986), 이는 곧 험난한 삶의 질곡이 희망을 되살릴 수 있는 재활적 힘의 원천인 로고테라피 신념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상처가 있는 사회는 병든 사회요, 그것이 마음의 상처라면 사회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라고 말할 수 없다. 더구나 가벼운 격려나 위로와 같은 립 서비스로 효험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상처가 깊은 경우에는 심층적 성찰과 각성을 출발점으로 한 심성 재정립(mental reset)이라는 적극적 해법을 필요로 한다. 범법자가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수용하고, 그로부터 쌓여가는 피해자와의 동반자 의식에 근거해 형성될 것으로 상정하는 공감적 치유로서의 화해적 사회통합은 개인 차원을 넘어선 시민공동체에 주어진 집단적 과업으로 많은 사람들의 능동적 참여와 협력을 요한다. 그 이념적 기초라고 할 수 있는 회복적 정의는 처벌 위주의 사회통제 양식을 넘어 갈등으로 인한 심적 고뇌나 상흔의 해소를 위해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는 소통적 전략을 지향한다. 수평적 대화를 통해 갈등 당사자들이 자신의 체험을 반성적으로 회고한 후, 각성을 통해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화합적 통합의 길을 열어갈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해적 사회통합론은 갈등 당사자들에게 상호협력적 문제 해결의 동기를 부여한다. 개인을 자유의지를 가진 도덕적 행위주체로 상정할 뿐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개인의 행위가 상호주관적 상호작용의 소산임을 자각시키기 때문이다. 징벌적·정죄적 사회통합은 대상자들에게 법적·도덕적 제재만 부과하고, 그들의 인식적·심정적 관계 회복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회고적 성찰을 동반하지 않는 복지적 접근도 그런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화해적 접근은 분쟁 당사자들에게 자성의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시민적 책무의식을 일깨워 퇴화된 인식적·심정적 관계 회복을 독려한다. 화해적 접근의 실효를 체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생애의 의미 있는 사건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긍정적 인간관, 사회관 및 세계관을 정초한다. 뿐만 아니라 회복적 원리에 기반한 진솔한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리는 과정에서 집단적 체험이나 감정을 재구성함으로써 화해의 토대가 공고화한다. 회복적 정의의 실천으로부터는 갈등과 같은 사회문제의 해결뿐 아니라, 위기극복을 위한 공동체 역량의 강화라는 부가적 효과도 기할 수 있다. 사회갈등을 해소하는 데 있어 억압적 통제나 물질적 보상이 아닌 인간 존엄성의 회복이나 공동체 의식의 복원이라는 사회적 연대감을 고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Ⅸ. 결어: 화합적 성숙사회를 향하여
국가발전보다 국민행복이 강조되는 오늘날 “이게 나라냐”라는 거국적 비난의 배후에는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냐”라는 힐난이 내재해 있고, 그 내면에는 “내 삶이 고작 이 뿐이더냐”라는 한탄이 농축돼 있다. 즉, 나라다운 나라에 살고 싶다는 욕구의 저변에는 사람 대접받으며 살고 싶다는 ‘품격사회(decent society)’에 대한 소망이 태동하고 있다.
빈곤 극복이 시대적 과제였던 1970년대까지 한국인은 등 따습고 배부른 상태를 동경해 왔고,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된 연후에도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통상적 덕담으로 오갈 만큼 물질적 풍요를 중시해왔다. 그러나 생활수준이 최대 관건이던 곤궁의 시기를 넘기면서부터 안전이나 주관적 만족감을 포함한 삶의 질로 관심이 이동했으며, 보다 최근에 들어서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증할 수 있는 ‘삶의 의미’가 생활관심의 중심권에 진입해 실존적 의미를 담보할 수 있는 품격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품격사회를 향한 집합적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심층 전략(deep strategy)의 모색에 천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라의 품격은 국민 개개인의 심성을 기초로 한다. 따라서 국격의 바탕을 이루는 심성(mind)의 가치가 날로 상승하고 있다. 이 점은 국가경쟁력의 요건 변화에 관한 최근 동향을 통해서도 감지할 수 있다. 오랜 동안 국제사회에서는 군사력을 중심으로 한 국력(國力)이 국가의 위상을 좌우하는 관건으로 꼽혔다. 그러나 냉전질서가 해체되면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국부(國富)가 한 동안 국가의 수준을 가늠하는 핵심 요소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부국강병론을 넘어 국가의 품격인 국격(國格)이 바람직한 나라의 요건으로 주목받기 시작하는 최근에는 국격의 기초를 이루는 사람들의 심성이 새로운 국가경쟁력의 예표로 대두되어 심성 자본(mind capital)의 중요성을 주지시키고 있다.
갈등과 통합에 대한 지난날의 연구를 다시금 되짚어보면, 갈등은 이해 갈등 및 정체성 갈등으로 대별되어 왔고, 갈등 해소를 위한 사회통합방안은 징벌적 접근, 복지적 접근 및 포용적 접근이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분류되어 왔다. 응보적 접근, 복지적 접근 및 포용적 접근은 각기 안정적 질서를 이상시하는 균제적 상상력, 경제적 형평성을 중시하는 공리적 상상력 및 상생적 삶을 강조하는 생태적 상상력을 인식적 기반으로 해 왔다. 이처럼 발상적 원천이나 목표가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학계 내외의 사회통합 담론에서는 관용, 배려, 양보, 희생, 공유, 나눔, 이해, 소통, 경청, 용서, 상생, 공존 등과 같은 좋은 말들이 무차별적으로 혼용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나, 너는 너”라는 격리적 피아관을 고수하는 복지적 접근이나 포용적 접근에 속하는 사회적 덕목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나와 남의 혼융을 전제로 하는 합체적 피아관 산하의 성찰, 자숙, 용서, 존중 같은 사회적 덕목들과는 차별성을 지닌 것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김문조, 2019).
기본적으로 전자는 동질화를 통한 일치를 지향하는 것인 반면, 후자는 화합을 통한 조화를 기본 목표로 한다. 즉, 전자는 위로나 연민과 같은 시혜적 조처를 통해 동정(sympathy)이라는 동질적 마음의 상태를 조성하는데 진력한다면, 후자는 나눔이나 협력과 같은 호혜적 상호작용을 통한 공감(empathy) 창출에 주력한다. 따라서 화해적 통합의 당사자들은 굳이 동일한 사고나 정서를 견지할 필요가 없다. 나와 남의 합체를 전제로 하는 화해적 접근이 의식세계의 심층적 변화를 요하는 수월치 않은 대안임에도 불구하고, 생각이나 느낌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섞여 사는 현대사회에 적실성을 지니는 이유는 무리한 단합이나 통일이 아니라 공감적 결속(empathic solidarity)에 기초한 화합적 사회통합(harmonious social integration)을 추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견해는 동질성이 인류의 미래를 축소시킬 위험이 크다고 경고한 실용주의 사상가 존 듀이(J. Dewey)의 다음과 같은 진술, “우리의 일체성(unité)은 동질적인 것들로 이루어질 수 없다. … 개별 인종이나 국민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들, 가장 특징적인 것들이 조화로운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고, 그 전체의 구성인자로 참여할 때 일체성이 창조될 수 있다”라는 글귀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Dewey, 1916). 요컨대 일체(unity)는 일치(unanimity)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동양 고사성어를 인용하자면,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일심동체(一心同體)가 아닌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차이를 인정하면서 조화로운 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화쟁적(和諍的) 노력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겠다.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되돌아보는 성찰이야말로 자숙과 용서를 거쳐 화해적 통합에 이르는 행로의 시발점으로 간주할 수 있다.
더구나 화해적 사회통합 과정의 가장 결정적 요소로 간주되는 용서를 주시해 볼 때, 그것은 이념이나 가치관 등 여러 모로 본인과 생각을 달리하는 남과의 결합을 위한 특단의 결의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시민적 덕목들과 크게 변별된다. 용서를 통한 화해의 메시지를 만방에 전파해 온 대표적 인물의 한 사람으로는 말씀의 중심에 항시 용서를 앞세워 온 프란치스코 교황을 들 수 있겠는데, 넬슨 만델라의 위업은 신앙인들이 중시해 온 용서의 신비를 세속적 질서에 접목시켜 인종 간 화해를 통한 사회적 대통합을 이뤄낸 데 있다고 평할 수 있다.
최근 우리 한국사회는 자신을 사회적 약자나 희생자로 일체화하는 사람들이 다수에 달하는 상태에 포박되어 있다. 대한민국이 ‘을(乙)의 공화국’이라고 지칭되리만큼 많은 국민들이 주변화(marginalized)·소수자화(minoritized)되어가고 있음이 역력하다. 그 뿐인가. 심화되는 빈부격차, 증가하는 빈곤층, 부러진 계층 사다리, 늘어나는 이민 희망자, 하락하는 행복지수, “부모보다 못사는 최초의 자식 세대,” ‘노력해도 흙수저,” ‘N포 사회,’ ‘약육강식의 배틀그라운드,’ ‘갑질 횡포,’ ‘악다구니 사회,’ “사기범죄 1위 국가,” ‘시위 천국,’ ‘희망지수 하락’ 등과 같은 제하의 언론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맘충,’ ‘한남충,’ ‘틀딱충,’ ‘급식충,’ ‘설명충,’ ‘난민충,’ ‘개슬람,’ ‘똥남아,’ ‘김치녀,’ ‘개저씨’ 등과 같은 혐오성 용어들이 성행하고 있음은 곧 우리 정신세계가 얼마나 황폐화하고 있는가를 절감케 한다. 이러한 심성적 악화 증후는 1997년 환란 이후에 출현한 ‘양극사회(兩極社會)’가 ‘대결적 각축을 특징으로 하는 ‘상극사회(相剋社會)’로 전환되어가고 있음을 함의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는 물적 생활수준의 증진에 주력하던 단계를 지나고, 주관적 차원을 포함한 삶의 질적 향상을 추구하던 단계도 넘어 개개인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삶의 의미로 관심이 확장되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변화의 징후는 크게 다음 두 가지 차원에서 읽혀진다. 첫째는, 국가에서 개인으로의 초점 이동이요, 둘째는 삶의 질을 대변해 온 안녕(well-being)대신 의미 있는 삶의 의식적 토대인 품격이 새로운 생활관심(life-interest)의 중심권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품격 개념의 화용론적 가치는 공동체 의식과 같은 정신문화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양적 성장에 대신한 내면적 발전을 대안으로 내세운 ‘성숙사회론(theory of mature society)’에서 명시적으로 표출되고 있다(김경동, 2012; Gabor, 1972).
사전적 의미의 ‘성장(成長)’이 사람을 비롯한 생체의 크기나 규모가 커지는 것이라면 성숙(成熟)’은 생체의 균형적 발육, 특히 신체적 성장을 뒷받침하는 정신적·의식적 발달에 해당하는 것으로, 성숙 개념은 개인을 넘어선 사회체계의 진전 과정에도 능히 적용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현대사를 장식해 온 양대 핵심 동학은 산업화와 민주화였다. 그러나 고성장 기조가 꺾이고 87년 체제도 퇴조하면서 우리 사회는 산업화나 민주화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발전적 의제를 요청하고 있는데, 성숙화가 그 가장 유력한 대안이라고 본다.
최근 신기술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견지하는 가트너社를 위시한 기술애호론자들은 기술 발전의 궤적을 과대광고주기 모형(hype cycle model)으로 제시한다(Gartner, 2022). 그런데 이를 중간 과정을 사상한 간결한 형태로 단순화하면 S자형의 성장모형(sigmoidal growth model)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럴 경우, 인류 역사는 “확대성장 및 침하정체”의 연속적 반복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 지난날 모든 활동이 지체되는 암흑시대로 단정하곤 했던 정체기를 새로운 성장 동력을 예비하는 관념이나 사상이 형성되는 의식적 대전환기로 재평가할 수 있다.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말한 인류 정신사의 획기적 비상 시기인 ‘차축(車軸)시대(axial age),’ 혹은 문예부흥이나 종교개혁을 촉발한 계몽주의 시대가 바로 그러한 시기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김문조 외, 2018; Jaspers, 1949). 따라서 제4차 산업혁명이나 코로나10 사태 이후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으로 외부세계가 급변하는 와중에 개인의 실존적 가치를 중시하는 품격사회에 대한 열망의 마그마가 최근 우리 사회 저변에 결집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사회가 안팎, 고저, 좌우, 남녀, 주류-비주류와 같은 갈등의 주체들을 화합적으로 결속시킬 수 있는 화해적 사회통합을 향한 성숙한 의식의 발양에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강력히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