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며
2021년 5월 27일,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328건의 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328건의 사건 중 서산개척단, 선감학원, 형제복지원 사건들은 아동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권침해 사건이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들을 조사하기로 결정한 데는 한국사회의 인권감수성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들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이들은 기존 과거사 정리의 흐름 속에서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했으나, 한국 사회의 비약적인 인권감수성 발전을 통해 새롭게 조명된 사건들이다. 특히 사회로부터 강제로 배제됐던 이들이 스스로 인권을 자각하고 진실규명 촉구 활동에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진실화해위원회, 2021: 2).
이들 세 사건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여러 사건이 하나의 범주로 묶여 있는 형태다. 서산개척단은 281명이 신청한 4개의 사건이고, 선감학원은 7개의 사건을 132명이 신청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차로 조사 개시한 사건들 중 가장 많은 인원인 303명이 신청했고, 개별 사건 수도 67건으로 울산국민보도연맹사건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진실화해위원회, 2021: 6). 진실화해위원회가 이들 사건을 조사개시하기로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서산개척단 사건 조사결정 이유 - 서산개척단은 정부 관할 하에 관리·운영되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단원들에 대한 강제수용, 강제노역, 강제결혼, 구타, 감금 등 인권침해가 존재하였을 개연성이 인정됨에 따라, 조사를 통해 피해 유형 및 피해 규모, 구체적인 피해 사실을 파악하고, 진위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어 조사 개시함.
· 선감학원 사건 조사결정 이유 - 1989년 참회소설 “아! 선감도”가 발표된 이후 MBC 8·15특집극 ‘선감도’,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KBS ‘추적60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등 각종 언론 보도 및 국가인권위원회의 ‘아동 인권침해사건 연구보고서’ 등에 의하더라도 신청인들의 주장과 같이 선감학원의 인권침해 사실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조사 개시함.
· 형제복지원 사건 조사결정 이유 - 동아대학교 산학협력단의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실태조사 결과보고서’,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등 각종 언론보도에 의하더라도 형제복지원에서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진실규명이 필요해 조사 개시함.
(진실화해위원회, 2021: 8-9)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내용을 보면 서산개척단 사건과 나머지 두 사건의 이유가 다르다.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사건 모두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와 같은 언론보도를 통해 어느 정도 사건 개요가 알려졌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아동 인권침해사건 연구보고서’, 동아대학교 산학협력단의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실태조사 결과보고서’와 같은 보고서가 이미 존재한 상태다. 그럼에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이 두 사건은 여전히 사회기억(social memory)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과거의 사건과 경험을 회상하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억들을 가진 주체들이나 집단들의 끊임없는 기억투쟁(the struggle for the memory)을 통해 선별”된다(이성우, 2011: 67). 다양한 주체들과 집단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사회기억이라고 한다. 다양한 기억들의 기억투쟁을 통해 국가가 인정하는 혹은 공식으로 인정받는 기억을 공식기억(official memory)이라고 한다. 사회기억은 여럿일 수 있으나, 공식기억은 하나다. 어떤 사회기억은 공식기억으로 남지만, 어떤 기억들은 사회망각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공식기억만 남기기 원하는 집단도 있으며, 국가나 기득권층들이 오히려 이를 조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식기억이 영원불변한 것은 아니다. 국가와 기득권층의 이러한 사회망각에 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회기억으로 남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기억투쟁이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언론보도와 학계의 보고서는 바로 기억투쟁의 일환이다. 최근에 출간한 『절멸과 갱생 사이–형제복지원의 사회학』 역시 형제복지원 사건의 사회기억을 두텁게 해주는 결과물들이다.
II. 기억투쟁의 정석으로서 형제복지원의 기억투쟁 과정
기억투쟁에서 승리한 사회기억들은 국가의 공식기억을 바꾸기도 한다. “불순세력의 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바뀐 광주 5·18이나 “빨갱이폭동”에서 “평화운동”으로 바뀐 제주 4·3은 바로 기억투쟁을 통해 사회기억을 공식기억으로 바꾼 대표 사례다. 여전히 진행형이고, 아직도 조사거리도 쌓여 있으며 화해할 일도 많이 남았지만, 이 두 기억들은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꾀함으로써 공식기억으로 전환이 가능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을 조사하려는 이유 역시 사회기억을 공식기억으로 전환하기 위한 첫 발걸음으로 볼 수 있다.
두 기억 중 어느 것이 먼저 공식기억으로 전환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감히 예상을 해 본다면 형제복지원 사건일 확률이 높다. 기억투쟁에서 핵심은 기억 당사자들의 인지 해방(cognitive liberation)이다. 당사자들만큼 기억투쟁에 강력한 주체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학자로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사회운동의 활동가들의 관심도 필요하다.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기억 당사자들의 인지 해방을 도와주고, 함께 투쟁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인지 해방과 지원군에 더해 형제복지원 사건은 선감학원 사건보다 사회기억이 많이 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식기억으로 전환이 빠를 것이라 예상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6년 겨울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의 수사를 시작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김용원 검사는 1987년 1월 원장 박인근 포함 5명을 구속한다. 그러나 사법처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사건은 마무리됐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정권의 은폐, 축소에 그 원인이 있다.
사건이 알려지고 사회적으로 공분을 일으키자 정권은 사건 해결과 대책 마련에 고심하는 제스처를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 축소하려고 시도했다. 당시가 군부독재체제였던 만큼 사건 축소, 은폐 시도는 노골적인 형태로 자행되었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286).
군부독재체제를 무너뜨렸던 민주화운동의 기세에 올라탔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민주화운동의 주체인 학생과 지식인의 시선에는 형제복지원에 관심은 없었다. 형제복지원의 수용인들이 부랑인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집단의 주된 관심대상은 군부독재를 끝장낼 ‘변혁의 주체’, 혹은 기본계급으로서 기층민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볼 때 부랑인은 자본가에 맞서는 노동자가 아닌 자본주의의 부산물인 하층 ‘룸펜 프롤레타리아’일 뿐이다. … 중략 … 민주화운동권의 관심은 체제변혁이었고 그들의 생각에는 군부독재체제를 무너뜨려야 비로소 사회의 나머지 부문도 민주화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체제변혁을 위해 나머지 부문 역시 희생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부랑인’뿐만 아니라 장애인, 여성 등 소수자도 부차화되었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287-288).
수용자 당사자들 역시 민주화운동 기세에 올라탄다는 생각, 집단행동을 통해 원장 또는 국가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 즉 인지 해방을 이루지도 못했다. 당사자들의 인지 해방이 이뤄진 때는 사건이 발생한 지 25년이 지난 2012년이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였던 한종선은 이 해에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한다.
2011년 일명 ‘도가니’ 사건을 목도하고 ‘형제복지원 사건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판단한 한종선은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영화 <콜레트럴>에서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고 2012년 5월 어느 날 직접 피켓을 만들어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한다. 한종선은 이 ‘사건’을 “짐승에서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 중에 내가 했던 최초의 일이었다”고 표현한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298).
한종선의 인지 해방은 누구의 도움을 받아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는 2008년 광우병 쇠고기 관련 시위 참여를 시초로 해서 서서히 인지 해방을 이루어 냈다. 홀로 자료를 찾아 나가면서 천천히 인지 해방을 이룬 그와 달리 이후의 당사자들은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는다. 학자와 지식인들로 구성한 형제복지원 사건 대책위원회를 결성하면서 피해자모임도 만들어진다. 대책위원회와 피해생존자 모임은 토론회를 개최하고 특별법 제정에 집중한다.
이들은 다른 사회운동 등과 마찬가지로 집회, 시위, 농성 등을 진행하지만 추모제, 증언대회 등과 같이 피해자 혹은 유족들만이 할 수 있는 사회운동 레퍼토리들도 활용한다. … 중략 … 민주화 이후 지속되어 온 과거사 진상규명운동이 만들어 놓은 다양한 사회운동 레퍼토리들은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운동이 단시간 내에 체제를 갖추고 운동을 본격화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303).
이후 법제정에 난관이 부딪히면서 대책위 활동은 줄어들지만, 반대로 피해생존자 모임 활동은 본격화됐다. 피해생존자들은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대책위 활동 속도에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피해생존자들은 대책위의 활동을 고마워하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분들은 배우신 분들이고 하니까 저희가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마는 너희들이 피해자니까 너희들은 가만있어 우리가 알아서 할 게 하는 거는 … 불만들을 가지고 있죠(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306).
이런 상황에서 피해생존자 모임 활동들은 스스로 기획하고 운영하는 활동이 늘어났다. 이는 모임 구성원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에는 대책위의 속도와 방향에 맞춰 따라다녔던 피해자들의 모임이었다면 이제는 인지 해방한 활동가들의 모임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대책위와 피해생존자 모임의 관계도 변했다.
어느 순간 피해자모임이 중심에 딱 스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오∼오케이 좋아 너무 좋아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세요. 우리는 그런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면서 가겠습니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309).
형제복지원의 기억투쟁은 인지 해방을 이룬 피해생존자들이 기억투쟁에 중심에 서고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지원하는 관계로 정립됐다. 이에 더해 언론에서도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보인다. 2011년 형제복지원 사건을 최초로 다룬 이후, 2014년 3월 22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홀로코스트 그리고 27년 – 형제복지원의 진실”을 방영했고, 같은 해 8월부터 10월까지 한겨레신문에서는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을 실었다. 2019년 2월 7일 JTBC <스포트라이트>에서, 같은 해 12월 9일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방영했다. 2020년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이라는 사이트를 개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형제복지원 자료까지 망라해서 제공하고 있다. 2021년에 들어서도 TVN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제1회(4월 4일)에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뤘다. 이처럼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사회기억은 피해생존자, 학자, 지식인, 활동가, 언론들을 통해 꾸준히 쌓여가고 있다. 거기에 투쟁의 주체인 피해생존자 모임, 이들을 지원하는 학자, 지식인, 활동가들의 모임(대책위), 끊임없이 사건을 환기시켜 망각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언론. 이들의 역할 분담은 기억투쟁의 정석이라 할 수 있다.
III. 변혁적 정의를 위한 『절멸과 갱생 사이–형제복지원의 사회학』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인지 해방을 이뤄냈고, “피해생존자”가 아닌 진실과 화해 그리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가로서 우뚝 섰다. 피해생존자들의 인지 해방을 도와주며 초창기 활동을 주도했던 대책위원회는 이제 다양한 방면으로 피해생존자 모임을 지원해주는 역할로 변했다. 언론과 방송은 기사를 보도하고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역할을 하며 형제복지원 사건이 잊히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형제복지원 사건의 사회기억인 동시에 공식기억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이들 말고도 형제복지원의 진실과 화해 그리고 정의를 위해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서울대학교 형제복지원연구팀이다. 이들이 쓴 『절멸과 갱생 사이–형제복지원의 사회학』 역시 사회기억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책은 피해자모임, 대책위, 언론과 다른 차원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기억한다는 면에서 특별하다.1)
이 책의 특별한 면은 형제복지원에 대한 “관심의 차이”다. 피해생존자는 말할 것도 없고, 대책위원회나 언론과 방송 모두 형제복지원 안에서 “무엇(What)”이 벌어졌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이들은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일들의 진실을 조사할 수 있는 법 제정과 형제복지원을 이용했던 국가의 목적을 알기 원한다.
이 법을 통해 형제복지원을 둘러싼 폭력의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를 규명하여, 궁극적으로 국가의 법적 책임을 밝히고 싶어한다. … 중략 … 또는 형제복지원이 “규율 권력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형제복지원이 정권의 기획에 어떻게 부합했는가를, 그리고 정권이 배제하려 했던 인간형은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만들어내려 했던 인간형은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고자 했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10).
그러나 『절멸과 갱생 사이–형제복지원의 사회학』은 이와는 다르게 접근한다. 이 책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왜(Why)” 그리고 “어떻게(How)” 가능했는지, 형제복지원을 “왜”, “어떻게” 운영했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이러한 관심의 차이는 이 책이 다른 보고서나 학술논문 또는 회고록들과 차별점을 갖도록 한다.
이 책은 8장 3부로 구성이다. 1장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왜” 그리고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1장은 형제복지원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형제복지원을 둘러싼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제목도 “부랑인에 대한 사회배제적 구조”다. 이 책이 관심을 보이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왜”,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대답이 바로 1장의 제목이다.
한국사회의 구조들 중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에 있는 것들이 꽤나 많다. 사상통제, 성매매정책, 종교정책 기원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있다.2) 부랑인에 대한 사회배제 구조 역시 그 기원은 일제강점기에 있다. “사회적 배제의 형성”을 1부 1장에 배치한 이유도 형제복지원의 기원이 바로 일제의 부랑인 정책에 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부랑나환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태도는 전염병의 통제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중략 … 낙인찍힌 집단을 도시에서 추방하거나 외딴 곳으로 격리함으로써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56-57).
1장이 사회적 배제의 기원인 일제강점기의 이야기였다면 2장은 광복 이후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배제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제목도 “사회적 배제의 지속과 변형”이다. 광복 이후 한국 사회는 껍데기인 나라는 되찾았지만,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도와 사회 인식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것을 답습하고 있다. 사회배제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부랑인들을 수용하는 형제복지원의 탄생과 그들을 통제하기 위한 폭력성 높은 운영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회배제를 규율정치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시각은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발전국가 시기 국가가 보여준 사회정치는 ‘규율(discipline)’과 거리가 있다. 푸코는 프랑스 복지국가가 황금기를 막 지나는 시점에서 복지국가를 비판하기 위해 이 개념을 활용했다. … 중략 … 이와 달리 발전국가 시기 당시 한국은 캠페인 이상으로 구성원의 일상을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다. 복지 지출은 늘 최소한으로 억제했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65).
1장과 2장이 형제복지원과 같은 사회배제가 “왜” 생겼는지에 대한 대답이라면 3장은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대답으로, “사회적 배제의 기술들”을 알려준다. 국가는 부랑인들을 단속하고 관리하는 데 있어 지방자치단체, 복지 및 건설 관계 부처뿐 아니라, 경찰, 검찰, 법원과 교정 기관을 동원한다. 이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단순히 민간 시설사업자의 “일부 일탈”이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기간 화제가 됐던 대전 성지원 사건이나 선감학원, 광주 인화학교, 소쩍새 마을, 장항 수심원 사건들을 보면 형제복지원과 같은 사건은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현재진행형이다. 형제복지원은 “사회배제자”들을 배제하는 구조와 배제의 기술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행위자일 뿐이다.
다양한 행위자의 이해와 ‘발전’에 대한 상이한 욕망이 어떻게 서로 접합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때, 수용시설에서의 노동착취와 폭력이 그저 ‘묵인’된 것이 아니라 시설의 유지와 운영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115).
1부가 형제복지원이 “왜”,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대답이라면, 2부는 형제복지원의 운영과 폭력이 “왜”,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2부 4장은 형제복지원의 운영과 폭력이 “왜” 가능했는지 대한 답이다. 4장의 제목은 “‘돈벌이’가 된 복지”로, 형제복지원의 운영과 폭력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돈벌이였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시설이 아니라 사회복지법인이다. 사회복지법인의 목적인 복지사업 중 복지가 아닌 “사업(business)”에 초점을 맞추면 형제복지원의 운영과 폭력이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국가의 입장에서 부랑인은 단속, 비가시적 영역으로 격리되어야 하는 존재들이었고, 사회복지법인의 입장에서 이들은 인원에 비례하여 국고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매개체이자 시설확장, 수익기업체 운영 등에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이었다. 수용자의 존재 그 자체가 경제적 자원 획득의 가장 주요한 통로가 되었기에, 부랑인 수용시설의 운영은 일종의 유사 인신매매적 특징까지 띠게 되었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159-160).
2부 5장은 형제복지원 운영이 “어떻게”에 대한 답이다. 형제복지원은 ‘자활’을 내세워 운영했다. 국가와 시설이 의미하는 ‘자활’은 경제적 독립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실패했다. ‘자활’의 실패는 형제복지원 운영의 실패이지만 국가는 형제복지원에 대해 훌륭한 시설이라는 평가를 한다. 이는 형제복지원과 국가가 내세우는 ‘자활’과 일반 의미의 ‘자활’의 괴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수용시설에서 자활이란 시설의 입장에서 사회복지시설의 확장의 이유가 되고, 수용자들을 노역에 동원하는 명분이 된다. 그렇기에 이 허약한 자활에 대해 정부가 제대로 된 관리를 하기보다, 실적과 명분을 위해 정부와 시설이 공모할 때 자활을 위한 재정 지원은 시설의 사익에 이용될 여지가 크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194).
형제복지원은 운영도 운영이지만 시설 안에서의 폭력성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2부 7장에서는 형제복지원의 폭력이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에 관심을 보인다. 특히나 개신교라는 종교를 내세운 형제복지원의 폭력은 더더욱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규율을 강제하는 “총체적 기관”으로 형제복지원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형제복지원의 규율은 왜곡이 심했고, 보상과 처벌 체계는 폭력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은 인구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과학적 지식을 결합한 규율권력의 주요한 장치라기보다는 이 장치들의 몇몇 기술과 외양만을 빌린 유사규율권력(pseudo-disciplinary power)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222-223).
1, 2부가 사회구조와 형제복지원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3부는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형제복지원은 법인이자 시설이지만 그 안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형제복지원에서 그들의 삶이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형제복지원 사건 이후에도 삶을 살았다. 형제복지원에서 정상이 아니었던 삶은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모두 같았지만, 밖에 있었던 사람들과는 다른 삶이었다. 3부 7장의 제목 “다르게 흐르는 시간”은 형제복지원 안과 밖의 시간이 다름을 의미하며, 이들의 형제복지원 안에서 삶을 들여다봤다. 이들의 삶을 재구성하는 이유는 여전히 형제복지원은 우리 곁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근대사회라는 구조 속에서는 형제복지원과 같은 사건이 계속 벌어질 수 있음을 경고함과 동시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다짐이다.
형제복지원은 더 문명화되면 사라질 야만적인 것도, 근대화 과정에서 격퇴해야 할 전근대적인 것도 아니다. … 중략 … 이것은 근대화·문명화의 결과다. … 중략 … 총체적 기관에 수용된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눈에 잘 띄지 않은 채로 여전히 우리 곁에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277).
8장은 “삶과 시간을 새롭게 쓰기”에서는 형제복지원 그 이후의 삶을 추적하는 것 역시 7장의 목적과 마찬가지다, 형제복지원과 같은 사건이 다시 나오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해자와 공동체의 회복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회복적 정의의 실현을 바랄 뿐이다.
피해생존자들의 트라우마 극복과 자존감 회복 역시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설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보상이 되더라도 지속적으로 치유의 시도와 노력이 요구된다. 여전히 운동이 지속되어야 하며, 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요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서울대학교사회학과형제복지원연구팀, 2021: 314).
IV. 나오면서
형제복지원과 같은 과거사를 정리하는 이유는 진실을 규명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화해를 진전시키는 것이다. 언론보도와 방송은 사회기억을 망각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진실 규명에는 한계가 있다. 피해생존자 활동과 대책위원회 활동은 진실을 규명하는 데 큰 힘이 된다. 그러나 언론보도와 방송, 피해생존자 활동과 대책위원회 활동으로 가능한 것은 진실규명과 보상까지다. 진실을 규명해서 가해자는 벌을 받고, 피해자는 보상을 받는 것은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일 뿐이다. 그렇다면 응보적 정의의 실현으로 충분한 것일까?
응보적 정의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것이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다. 회복적 정의는 피해자와 가해자, 당사자와 공동체의 관계회복에 중점을 둔다. 이때 필요한 것이 화해다. 제주 4·3과 광주 5·18도 사회기억을 공식기억으로 전환은 가능했지만, 여전히 진실규명과 보상을 넘어 화해를 하지는 못하고 있다. 회복적 정의는 진실규명과 피해보상과 같은 응보적 정의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절멸과 갱생 사이–형제복지원의 사회학』이 다른 차원에서 특별한 점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과거사 정리에 있어 새롭게 대안으로 떠오르는 “변혁적 정의(transformative justice)”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변혁적 정의는 폭력이 가능했던 사회·문화 구조를 바꾸는 정의다. 구조를 바꿔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사회적 배제 구조를 바꾸자고 주장한다. 2부에서는 국가-시설-지역사회의 사업 구조를 바꾸자고 주장한다. 3부에서는 응보와 회복을 넘어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이 나올 수 있는 구조를 경계하자고 주장한다. 책 전역에 있어 시종일관 내세우는 것이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이 나올 수 있는 구조를 바꾸자고 한다. 구조를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변혁적 정의다.
이 책은 공식기억을 위한 사회기억이다. 이 책이 기록한 활동들은 공식기억을 위한 기억투쟁의 정석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응보적 정의를 위한 진실규명이다. 둘째, 피해자와 가해자가 화해할 수 있는 회복적 정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다. 그러나 이 책이 진정 이 사회에 필요한 이유는 현재 과거사 정리 패러다임을 바꿔야함을 주장하는 데 있다.
제2기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응보적 정의에 머물러 있었던 제1기에 비해 진일보했다. 하지만 여전히 회복적 정의에 머물러 있다. 이 책이 제안하는 정의는 회복적 정의를 넘는 변혁적 정의다. 행위자만 변해서 구조가 변할 수 없다. 변혁적 정의는 구조의 변화까지 요구한다. 제2의 형제복지원이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2의 형제복지원이 생기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