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아동이 누구인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아동기 담론은 시대와 사회적 배경에 따라 달라졌다. 역사적으로 ‘아동’ 개념은 17세기 이후 구체화되었다. 이 때부터 아동과 성인의 삶은 구별되기 시작했으며, 아동이 생활하는 주요한 공간은 학교와 가정이 되었다(Ariès, 1973). 특히 아동기 담론은 가정과 학교에서 아동이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성인들이 아동을 어떻게 교육하고 돌봐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지침이 되었다(김혜경, 2000; Pechtelidis and Stamou, 2017). 또한 가정은 아동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영유아 아동돌봄이 행해지는 아동기 담론 실천의 주요한 장소이며, 아동이 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학교와 함께 아동기 담론 실천의 협력적 장으로 작동한다(Haldar & Engebretsen, 2014).
이러한 아동의 삶의 배경에는 국가가 인구를 어떻게 관리하고 주조하는가라는 통치성(governmentality)이 내포되어 있다(Burchell et al., 2014). 국가는 인구집단의 구성원들이 적극적이며 생산적으로 생존할 것을 요구한다. 특히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인적자원으로 환원되므로 모든 인구는 자신을 계발하도록 한다(임미원, 2016). 이 과정에서 인구는 연령, 성별, 인종 등 다양한 집단으로 분할되어 통치되며, 아동 역시 인구의 하위집단으로 통치의 대상이 된다. 아동이 생활하는 학교와 가정, 이와 관련된 행정체계와 담론, 아동을 돌보고 교육하는 성인들은 아동의 통치 장치로 작동한다(김혜경, 2006; Rogers, 2009; 허경, 2012; 김민정, 2019).
2000년대 이후 어린이집과 어린이집에서 돌봄을 받는 영유아 아동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어린이집은 학교와 가정 이외에 새로운 아동의 통치 장치로 등장하였다. 어린이집은 공적 영역이라는 점에서 학교와 유사하지만, 주로 영유아 아동이 생활한다는 점에서 가정과 비슷하다. 하지만 어린이집은 교육기관인 학교, 사적 공간인 가정과는 다르기 때문에 어린이집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아동이 어떠한 방식으로 돌봄을 받아야 하는가,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지식 형성과 실천지침을 요구하게 되었다. 즉, 아동기 담론은 어린이집이라는 공간에서 영유아 아동돌봄에 적용가능한 용어로 명시되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국가는 학교와 비슷하게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인 누리과정을 통해 어린이집에서의 아동 돌봄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때 어린이집에 다니는 영유아 아동에 대한 개념이나 표현, 돌봄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 등은 영유아 아동기 담론에서 주요하게 강조하는 지점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어린이집에서의 아동돌봄은 보육교사에 의해 수행되는데, 이들은 누리과정에 나온 돌봄방식을 실천지침으로 따른다. 대부분의 어린이집이 국가의 재정지원으로 운영되고, 정기적으로 국가로부터 평가인증을 받는다는 점에서 어린이집 교사들은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을 준수할 수밖에 없다(보건복지부, 2020). 이러한 교사들의 아동에 대한 이해와 이를 통한 돌봄실천은 어린이집에서의 영유아 아동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아동기 담론이 아동이 누구인가에 대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교사들은 현대사회의 아동기 담론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 아동이 특성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주체가 된다.
어린이집에서의 돌봄은 현대사회의 아동-특히 영유아 아동-의 담론과 그 담론의 실천, 즉, 아동의 통치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이 연구에서는 영유아 아동의 통치 장치로서의 어린이집에 주목한다. 특히 어린이집을 위한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에서 나타나는 영유아 아동기 담론은 무엇이며, 교사들은 이 담론을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하는가를 포착하고자 한다.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에는 아동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교육학, 생물학, 아동학, 심리학 등 학술적 지식과 어떤 방식으로 아동을 돌보며, 그것을 어떻게 모니터링할 것인가에 대한 국가의 제도, 정책 등이 집약되어 있다. 또한 이를 현장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은 어린이집 교사이다. 아동기 담론이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에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명확하지만, 아동기 담론을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개별 교사들의 해석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최근 개정된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인 누리과정에 주요하게 나타난 아동기 담론을 살펴보고, 아동기 담론의 담지자이자 실천자인 교사들이 아동기 담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 아동기 담론을 기준으로 교사들이 아동을 어떻게 판단하고 범주화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II. 이론적 자원으로서의 통치성과 아동기 담론
푸코는 현대사회에서 국가가 그 국가의 구성원인 인구집단을 관리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통치성(governmentality)’ 혹은 ‘통치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고안하였다(Burchell at el., 1991). 현대사회에서 국가가 원하는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며, 그 역량을 증진시키는 사람이다(Cruikshank, 1999). 따라서 국가는 그 구성원들로 하여금 적극적, 생산적으로 생존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 때 국가는 구성원들에게 강제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특정한 정체성을 지닌 사회적 주체가 되도록 테크닉이나 절차를 통해 인도한다(Burchell at el., 1991).
국가가 테크닉이나 절차들을 통해 구성원들의 품행을 형성, 지도하거나 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통치성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통치’는 ‘품행의 인도(conduct of conduct)’로 정의된다(Burchell at el., 1991). 즉, 국가는 개인에게 일방적인 강요, 지배, 폭력, 억압을 통해 국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하는 강제적 권력을 행사하기보다 행정이나 제도, 프로그램 등의 테크닉과 절차를 사용하여 인간의 행동을 인도한다. 국가가 활용하는 테크닉과 절차들은 통치대상인 인구의 신체와 생활양식에 파고드는 구체적인 방식이 필요하며, 이 때 장치가 동원된다(신충식, 2010: 143). 장치는 전문가 집단인 학자와 정책전문가, 전문가들에 의해 생산되는 지식, 법, 관료제, 정책, 학교, 공장, 감옥 등 사회적, 정치적 제도를 동시다발적으로 포함한다. 즉, 장치는 강압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국가가 개인의 행위를 관찰하고, 감독하며, 개인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주조하도록 하는 통제수단이 된다(Burchell at el., 1991). 따라서 통치성은 인구집단이 자발적 행위자가 되도록 권력을 행사하는 제도나 과정, 분석과 반성, 계산과 전술들로 구성되는 통합적 체계이며, 통치의 목적을 위해 다양한 지식, 기술, 전략들을 배치하는 지침의 역할을 한다.
한편, 국가는 전 인구를 대상으로 통치하지만, 이 때 인구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인구는 국가의 구성원을 성별, 연령, 사회경제적 지위, 장애 여부, 혼인상태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분할된다. 인구집단의 분할은 통계를 기반으로 하는 인구학에 의해 하위 집단의 특수성을 부각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국가는 국가의 지속을 목표로 각 인구집단의 특수성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통치성을 성립해 나간다. 즉, 국가가 인구에게 요구하는 성품인 주체성은 인국집단의 특수성에 따라 다양한 장치와 담론에 포섭되어 각 인구집단에 전달된다.
예컨대, 인구집단 중 아동은 서구사회에서 중세를 지나면서 주요하게 부상한 집단으로서, 아동의 통치성을 논할 때 중요한 장치는 교육제도, 학교 등의 국가 제도와 행정관료집단, 아동학 등 전문지식과 연구자 집단, 부모와 교사 등 아동의 보호자, 아동에 대한 담론 등이다(Wells, 2011; 허경, 2012; Smith, 2014; Pechtelidis & Stamou, 2017). 특히, 가족과 학교는 아동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며, 국가의 직접 영향력 아래 있는 학교를 통해 아동과 그들의 가족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장치이다(Donzelot, 1979; 김혜경, 2000; Haldar & Engebertsen, 2014). 국가는 어떤 이념을 가지고 아동을 교육하고 양육하는가라는 지침을 학교와 가족에 전달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아동을 어떠한 인간으로 주조하는가에 대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 때 지침은 교육제도, 실행지침, 해설서, 교육이념이나 교육행정체계 등 다양하다. 또한 아동과 가장 가까이 있는 성인들인 교사와 부모는 아동 통치의 실천자로 작동하게 된다(Hennum, 2014). 교사와 부모들은 다양한 장치를 통해 구성된 아동기 지식을 실제로 적용하여 아동이 현대사회에 적합한 주체가 되도록 한다.
이와 동일하게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어린이집은 영유아 아동기 생활공간으로서 아동통치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또한 어린이집에서의 아동의 돌봄을 정의한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이나 아동의 돌봄을 실천하는 교사들 역시 영유아 아동 통치성의 장치로 작동한다. 즉, 이들은 영유아 아동이 어떤 일상생활을 해야 하며,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스스로 실천하도록 그 행동을 주조한다는 점에서 주요한 자원이다. 이러한 점에서 어린이집과 관련된 문헌과 교사들의 돌봄실천 양식 분석은 국가의 영유아 아동기 통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동기 담론(childhood discourse)은 아동의 존재와 일상생활과 삶의 경험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Pechtelidis & Stamou, 2017). 아동이 성장하여 성인이 된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동기 담론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해왔다. 예컨대, 유럽에서 아동기 개념이 17세기 무렵 등장한 이후 아동기는 성인기와 구별되는 독특한 시기로 인정되었다(Ariès 1973; Schnell, 1979; Cunningham, 2006). 이 시기 아동기를 둘러싼 사회제도와 구조의 변화가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서구를 중심으로 교육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하였고, 공적 공간이었던 가정은 아동의 생활과 가족의 친밀성을 위한 사적 공간으로 변화하였다(Ariès, 1973; Peters & Zhu, 2020).
아동기 개념이 등장한 이래 성인 의존성(dependence), 위험으로부터의 보호(protection), 성인과의 분리(segregation), 책임 지연(delayed responsibility) 등이 아동에 대한 관점으로 부각되었다(Schnell, 1979). 이러한 관점은 아동이 성인과는 다른 존재이면서도 성인이 되었을 때의 미래가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영향을 미쳤다. 즉, 아동기 담론은 미래의 가치와 현재의 가치를 모두 포함한 이중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아동노동이 금지되고 의무교육이 정착하였는데, 이는 교육을 통해 아동의 미래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 반영된 것이다. 같은 시기 아동대상 사망보험이 등장했는데, 아동 사망보험금은 아동이 노동자가 되었을 때의 평균임금을 산정하여 지급하기 시작하였다(Zelizer, 1994). 즉, 아동과 관련된 제도들은 ‘아동‘을 미래의 이상적 노동자로 설정하고, 성인노동자가 될 때까지 성인과의 분리, 보호, 성장을 위한 지원이 필요한 시기로 인식하였다(Zelizer, 1994; Cunningham, 2006).
한편, 현재적 존재로서의 아동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아동을 어떻게 돌보고 교육할 것인가로 이어진다. 서구역사에서 현대 이전까지 현재적 존재로서의 아동은 디오니소스적 관점과 아폴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었다(Jenks, 2005). 디오니소스적 관점은 아동을 야생적이고, 감정적이고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반면, 아폴론적 관점은 아동을 순수하고 선하고, 천사같은 면을 지닌 존재로 본다. 디오니소스적 관점은 서구사회에서 중세까지 지배했던 아동기담론으로, 아동은 성인의 통제와 규율을 받아야 하며, 필요하다면 신체적 징벌까지도 가할 수 있다. 아동은 성인의 통제하에 ‘올바른 도덕주체’(upright moral subject)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근대 이후 낭만적 아동(romantic child)에 대한 교육학과 발달심리학 지식을 혼합한 아폴론적 관점에서의 아동기 담론이 우세해졌다. 아동은 성인의 통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흥미와 재능을 발전시킬 자유가 있다는 의미에서 ‘아동-중심’ 접근을 통해 규율되어야 하며, 아동의 개별성과 독특성, 환경에서의 적응성을 고려해야 할 요소가 되었다. 또한 보호자의 역할로 아동의 심리적 행복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Jenks, 2005; Smith, 2014).
현대사회에서는 Jenks(2005)의 관점에 더해 아동의 참여와 책임을 강조하는 아테네적 관점이 부각되었다(Smith, 2011; 2014). 1980년대 아동인권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아동의 목소리(voice)와 선택(choice)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 시기 학계와 정부에서도 아동의 선택과 참여를 강조하는 정책과 연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테네적 관점은 아폴론적 관점을 일부 수용하지만 아동의 참여와 책임(participation and responsibility)을 더욱 강조한다. 이는 아동은 ‘유능한 아동 행위자(competent child-actor)’로 성인에 사회화 과정의 수용자가 아닌 파트너의 위치로 설정하였다. 또한 이전에 기술한 2가지 관점과 달리 아테네적 관점은 아동기와 성인기 사이의 경계가 약하다(Smith, 2011; 2014).
소위 아테네적 관점이라 불리는 21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아동기 담론은 발달심리학이 견지하는 아동과 성인이라는 이분법의 경계를 약화시켰다. 이분법적 관점은 아동과 성인을 뚜렷하게 구분된 것으로 보는데, 아동과 성인에게 미성숙과 성숙, 비합리성과 합리성이라는 속성을 부여하였다. 아테네적 관점이 우세해짐에 따라 아동은 미성숙하고 비합리적인 존재이므로, 성숙하고 합리적인 성인으로 발달해야 한다는 관점의 전환을 야기하였다. 현대사회의 신자유주의 지식기반 경제사회에서 요구되는 성인은 발달심리학을 기반으로 합리적 이성을 가진 성인이 아동발달의 종착역이라는 모더니즘의 아동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Ailwood, 2003).
아테네적 관점의 등장으로 인한 아동의 통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만들기의 맥락에서 부각되었다.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아테네적 관점 이전 아동기 담론이 미성숙한 아동과 청소년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발달시킬지에 초점을 두었다면, 신자유주의적 맥락은 아동으로 하여금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individual autonomy and responsibility)을 어떻게 발현하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Smith, 2011). 현대사회에서 아동은 성인과 마찬가지로 ‘적극적(agentive)’이고 ‘유능한(competent)’ 존재가 되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아동기 담론은 여러 제도, 실천, 법. 규정 등에서 다양하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에서는 2000년대 이후 ‘역량 있는 아동(competent child)’에 대한 강조가 유치원 커리큘럼에 등장하였다. 이러한 담론을 기반으로 성인은 아동이 ‘호기심(curiosity)’을 자극하며 긍정적인 경험을 쌓고, 환상을 ‘동기부여(motivate)’하며, 표현하도록 격려(encourage)’하고, 창의력을 ‘배양(cultivate)’하도록 도와주는 존재로 여겨진다(Haldar & Engebresten, 2014; Pechtelidis & Stamou, 2017).
III. 연구대상 및 방법
어린이집에서의 아동 통치의 실행에서 나타나는 아동기 담론과 아동의 범주화를 살펴보기 위한 주요 연구대상은 두 가지이다. 첫째,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인 누리과정과 이와 관련된 보고서들이다. 육아협동조합 등 일부 유형의 어린이집을 제외하고, 어린이집은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기 때문에 어린이집은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인 누리과정을 기준으로 돌봄을 수행한다. 이와 더불어 누리과정을 소개하는 정책문서들과 보고서 역시 영유아 아동이 누구인가에 대한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대상이 된다. 우선 국가수준의 커리큘럼 등 어린이집 관련 문헌들을 대상으로 내용분석을 하였다. 정책문서와 보고서 등에 나타난 단어들을 살펴보고, 이 단어들이 사용되는 맥락과 의미들을 분석하였다. 분석대상이 되는 주요 문헌들은 다음 <표 1>과 같다.
제목 | 발간년도 | 발간처/자료제공처 | 분류 |
---|---|---|---|
2019개정 누리과정 해설서 | 2019년 | 교육부·보건복지부 | 국가수준의 커리큘험 |
유아교육발전 기본계획(2018~2022) | 2018년 | 교육부 교육복지정책국 (유아교육정책과) | 정부 정책자료 |
누리과정 개정 정책연구 | 2019년 | 교육부·충청남도교육청·육아정책연구소 | 보고서 |
2020년도 보육사업안내 | 2020년 | 보건복지부 | 정책자료 |
두 번째 연구대상은 어린이집에서 돌봄을 수행하고 있는 보육교사들이다. 어린이집 교사들은 영유아 아동들이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아동을 돌본다. 이 때 교사들이 수행하는 돌봄은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인 누리과정에 나온 돌봄 지침을 가장 많이 참고한다. 즉,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에 내재되어 있는 아동기 담론은 교사들의 인식과 태도, 행동을 통해 아동돌봄에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국가수준의 커리큘럼과 국가의 정책문서에 나타나는 아동기 주요 개념을 교사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돌봄을 실천하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에 언어화된 표현의 아동기 개념의 실제 실천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살펴볼 수 있다.
위의 보고서들과 정책자료,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의 내용분석을 통해 도출된 결과는 교사들을 심층면접하기 위한 질문에 사용하였다. 연구자는 면접대상자에게 내용분석에 나타난 단어들과 주요한 내용을 설명하고, 해당 단어와 내용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어린이집 돌봄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그 과정에서 보이는 아동의 반응은 어떠한지 등을 질문하였다. 이 외에 어린이집에서의 돌봄에 대한 교사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교사들이 담지하고 있는 아동기 담론을 세밀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교사들이 생각하고 있는 돌봄방식, 돌봄이 어려운 상황과 돌보기 어려운 아동 등에 대하여도 질문하였다. 모든 면접 내용은 면접 대상자의 동의를 얻어 녹음하였다.
심층면접에 참여한 어린이집교사는 총 12명이었다. 면접은 2021년 6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진행하였다. 교사들은 눈덩이 표집을 통해 소개받았으며, 영아반과 유아반을 맡고 있거나 맡았던 교사들이 고루 포함되도록 하였다. 어린이집 유형은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어린이집은 국고보조를 받기 때문에 어린이집 인증 등 절차를 거치며, 정부의 모니터링을 받는 경우가 많아 누리과정에 나온 돌봄방식을 따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면접은 J, K, L교사 3인을 제외하고 1대1로 진행되었으며, 약 1시간 반에서 2시간 가량 진행하였다. J, K, L은 서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3인이 한꺼번에 면접에 참여하였다. 면접에 참여한 교사들은 <표 2>와 같다.
교사들의 심층면접 자료는 녹취전사하였다. 이후 모든 면접문서들을 문장 및 문단단위로 코딩하여 분류하였다. 코딩한 문장들은 위에서 기술한 내용분석의 결과들과 비교하여 실제 교사들의 해석과 비교하였다. 또한 코딩한 문장들과 문단에서 개념들을 도출하여 비슷한 개념들을 합산하는 방식으로 분석을 진행하였고, 최종적으로 주제별로 분류하여 정리하였다.
IV. 분석 결과
‘유아중심’1), ‘놀이위주’는 국가수준의 커리큘럼과 이와 관련된 보고서에 나타나는 주요 핵심 단어이다. 2017년 발표된 ‘유아교육 혁신방안’에는 ‘유아가 중심이 되는 놀이 위주의 교육과정 개편’을 명시하였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 9). 또한 2019년 개정된 누리과정은 ‘교실혁명을 통한 유아중심의 교육문화 조성’과제 중 ‘유아가 중심이 되는 교육패러다임 전환’을 근거로 한다(김은영 외, 2019). 한편, 2019년 개정된 누리과정은 ‘놀이를 통해’ 유아를 민주시민으로 길러내는데 있다고 명시한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 개정된 누리과정은 ‘놀이’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놀이가 학습이나 교수법을 위한 수단을 넘어 아동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강조한다.
누리과정에서는 이를 기존의 ‘교사중심’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교사가 미리 계획한 활동에 아동이 참여하는 교사중심에서 유아들이 주도적으로 놀이에 참여하는 유아·놀이중심으로 대체하도록 한다는 것이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 이처럼 어린이집에서의 돌봄을 규정하는 행정문서들에는 ‘유아중심’, ‘놀이위주’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국가수준 커리큘럼의 핵심단어인 ‘유아중심’ ‘놀이’라는 단어가 맞닿아 있는 내용과 이 단어들이 사용되는 맥락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영유아기 주요 경험으로서의 놀이’와 ‘주도적인 아동-되기/만들기2)이다.
국가 수준의 커리큘럼에 나타난 첫 번째 아동기 담론은 놀이를 통한 영유아 아동기 경험의 중요성이다. 국가수준 커리큘럼은 아동돌봄을 주로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는 학교의 교육 목표와 같은 맥락에서 설정되었다. 누리과정은 ‘국가 수준의 공통 교육과정’으로, 어린이집에서의 누리과정은 유치원과 학교 교육과정의 일환이라 명시되어 있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 누리과정에서는 학교 교육과정이 ‘학습자의 경험’을 강조하고, 학생이 ‘배움을 즐기는 교육’인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이집의 영유아들은 놀이를 통해 배움을 구현한다고 하였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 어린이집이 교육이나 학습을 지양하고 아동을 돌보는 기관임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누리과정 자체는 교육과정을 대신하는 일련의 활동으로 여겨진다. 이는 아동기 담론이 영유아기부터 학령기까지 연령과 기관에 상관없이 일련의 공통된 지식으로 작동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놀이는 학습과 동일한 맥락에서 사용된다. 어린이집의 영유아 아동은 놀이를 통해 의미 있는 경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경험을 하는 존재로 부각된다. 학령기 아동은 ‘학습’을, 영유아기 아동은 ‘놀이’를 기표(signifier)로 하고 있으나,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배우고, 경험한다는 동일한 기의(signifié)를 가지고 있다. 결국 누리과정의 놀이는 영유아가 어린이집에서의 일상이나 활동 속에서 알고, 익히고, 깨닫는 유의미한 경험의 총체로 의미화된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 김은영 외, 2019). 즉, 놀이는 단순히 아동이 하는 어떤 활동 이상의 것이며, 개인의 효율성을 높이는 경험으로 인식된다. 또한 놀이는 유아가 몰입하며 즐길 수 있는 것으로 교사의 일방적인 가르침이나 통제가 나타나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 놀이를 통해 아동은 스스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데, 놀이란 아동이 규칙을 만들고, 아동이 원하는 것을 하고, 세상을 탐색하고, 자신을 표현하며,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
국가 수준의 커리큘럼은 위에서 기술한 놀이의 특성을 강조하며, 놀이가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사들은 아동의 놀이를 지원해야 하며, 아동은 놀이를 통해 누리과정에서 추구하는 인간상의 특성을 보여야 한다. 이 인간상은 건강하고, 자주적이고, 창의적이고 감성이 풍부하며, 더불어 사는 사람이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 결론적으로 놀이는 아동을 특정한 인간상으로 주조할 수 있는 일련의 경험들의 집합으로 해석되며, 개인의 일상생활을 자본화하는 혹은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자원으로서의 위치를 점유한다.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에 나타난 두 번째 영유아 아동기 담론은 주도적인 아동-되기/만들기이다. 누리과정은 아동이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교사와 함께 어린이집에서의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또한 교사가 ‘누리과정을 획일적으로 운영’하거나 ‘교사가 계획한 자유선택활동을 중심으로 놀이를 운영’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에 교사는 활동계획안 작성을 최소화하고, 유아가 놀이를 주도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 즉, 아동은 교사의 통제를 받는 대상이 아니라, 교사와 함께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자율적 주체로서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물론 이러한 언설이 아동과 교사가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주도적인 아동이라는 존재를 부각하기에 충분하다.
누리과정은 영유아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스스로 놀이하며 배우기 때문에 이들이 놀이를 주도해야 한다는 언설을 반복한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13). 이와 같이 누리과정에는 아동중심, 놀이위주라는 단어는 자율성, 주도적, 선택, 책임이라는 단어들과 함께 배치되어 있으며, 적극적 주체로서의 아동을 부각한다. 놀이로 통칭되는 이 경험/활동의 성격은 아동이 스스로 선택하고 경험의 상황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주도적, 자율적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경험은 아동이 직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거나, 어떤 것을 ‘책임’지는 상황을 포함한다. ‘유아는 스스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며,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 책임지는 경험을 하면서 자율성을 기른다’라고 제시한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 27).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에 나타난 영유아 아동기 담론의 핵심은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경험을 통해 역량을 키우는 아동에 대한 강조이다.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사는 아동은 놀이를 통해 경험을 쌓고 선택의 자유가 있는 주체이다. 이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선택과 결정의 자유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관리하고 자기를 계발하도록 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와 그 맥을 같이 한다(박소진, 2009; 고은강, 2011; 김은준, 2015). 신자유주의 사회, 지식기반 경제사회를 살아가는 성인들에게 요구되는 아동기는 자본주의와 근대사회에 필요한 성인이 보냈던 아동기와는 달라야 한다는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Aliwood, 2008). 아동은 발달‘되어야 하는(becomings)’하는 존재를 넘어 현재에 ‘있는(beings)’ 존재로 여겨진다(Haldar & Engebretsen, 2014).
따라서 발달심리학에 기반한 발달적 관점의 아동기 중요성의 강조는 약화된다. 발달적 관점은 칸트의 이성주의를 기반으로 미성숙한 아동에서 성숙한 성인으로 이행하기까지의 단계별 성장이나 발달을 전제로 한다. 아동의 발달은 언어, 인지, 도덕, 사회성, 정서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다. 학문분과나 학자에 따라 아동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유전과 사회문화, 양육환경 등을 비롯해 다양하다고 여겨지지만, 특정 연령대가 되면 그 연령에 해당하는 발달과제를 성취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여태철, 2006; 정석환, 2008; 박지선, 2014). 예컨대, 비고츠키의 사회문화적 발달이론에서 아동은 기본정신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기본정신능력은 아동의 연령이 증가하고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상위의 고등정신능력으로 발달한다(정석환, 2008). 또한 발달론적 관점에서 성인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는 아동은 성인으로 상징되는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상태에 이르기까지 자율성을 지닐 수 없으므로 성인의 통제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여태철, 2006; 박지선, 2014; Haldar & Engebrestsenm 2014).
반면, 국가수준 커리큘럼에 나타나는 ‘유아중심’과 ‘놀이위주’ 맥락에 나타나는 아동기 담론은 아동을 성인의 통제를 받아야만 하는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Pechtelidis & Stamou, 2017). 오히려 아동은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으며, 선택 경험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물론 이러한 언설은 아동이 성인만큼 자율성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달론적 관점에서 나타나는 아동-비합리적, 성인-합리적이라는 명확한 구분은 드러나지 않으며, 특정 발달과업도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동의 신체와 시간은 성인이 통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아동이 일상생활에서의 체험을 통해 스스로 통제하여야 하는 자기관리의 대상이 된다. 선택하는 존재인 아동의 특성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아동이 흥미를 보이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동중심주의라는 개념에는 아동이 원하는 것, 아동이 흥미를 가지는 것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때 교사의 주도성은 유보되며, 아동의 욕구가 부각된다. 기존에 아동이 하는 것들을 아동의 의사와 상관없이 성인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당연하였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동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동기나 내적인 신념에 따라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흥미’라는 용어로 환원되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둘째, 아동을 책임지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물론 아동을 성인과 같은 수준에서 자신의 삶,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상황, 감정, 관계 등 모든 면을 개인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존재로서 개인의 삶에 대한 책임은 아동이 미성숙함이나 의존성을 강조하는 수준에서는 쉽게 부각되지 않는 것들이다. 미성숙하다는 것 자체가 책임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기술한 아동의 2가지 성격은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아동화 된 형태이다.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에토스’는 개인의 행위는 자신의 결정에 근거한 자유의지의 표현이며, 결과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자기결정에 책임지는 주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에 나타난 아동기 담론인 신자유주의적 주체라는 자기관리(self-management)가 어린이집이라는 장치를 통해 실행됨을 보여준다(박소진, 2009; Haldar & Engebretsen, 2014).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인 누리과정에 나타난 영유아 아동기 담론이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아동이다.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아동의 의미는 이와 함께 있는 교사들의 해석에 따라 아동돌봄에 다르게 적용된다. 면접을 통해 교사들이 이해하고 있는 아동기 담론의 특징은 아동의 주도성에는 행동에 대한 각본(script)이 존재하며, 경험자본의 축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린이집에서 교사들의 돌봄실천을 통해 나타나는 첫 번째 아동기 담론은 놀이를 시작하고 전환하는 주체는 아동이라는 것이다. 이는 국가수준 커리큘럼에서 명시하고 있는 아동의 주도성, 자율성과 관련이 있다. 교사들은 아동들이 바퀴나 병뚜껑같이 흔한 사물을 소재로 삼아 의견을 내는 일을 ‘놀이’로 재개념화한다. 이 과정에서 교사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은 이 놀이를 ‘아이들이 시작 혹은 전환’한다는 점이다.
그냥 딱 바퀴하나 가져다... 바퀴나 아니면 병뚜껑 하나 가져다 놓고, (아이들이) 거기서부터 그냥 시작을 하더라고요. 병뚜껑 하나를 놓고 아이들이 말하는 의견대로 이제 그거를 뭐... 놀이를 시작하더라고요(사례 G).
플라스틱을 가져다가 뭔가를 만들거나 그걸로 뿌리거나 다른 놀이를 했었는데...이제는 얘는 또 이거를 이용해서 또 다른 놀이를 시작하겠지...(사례 H)
물론 교사들이 놀이를 언급할 때, 아동이 참여하는 활동이 아동에 의해서만 시작되거나 전환되는 것만을 놀이라고 설명한 것은 아니다. 교사가 준비하고 아동에게 참여를 권유하여 시작되는 활동 역시 놀이로 이해하지만, 아동에 의해 시작되거나 다른 활동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이들이 중심’이 된 놀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하였다(사례 G, 사례 H). 이와 더불어 교사들은 아동들이 놀이에 관한 규칙을 새롭게 구성하고 변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설명함으로서 아동이 놀이에 영향을 미치는 적극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럼 아이들 입에서 나와야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지금 프로젝트처럼 질문을 하거나 아이들이 놀이에 관심을 가지거나,..(사례 F).
아이들이 놀이를 하긴 하지만 항상 놀이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이 아이들이 만든다고 같이 만들지만...지금 놀이현장 보면 아이들 규칙도 아이들이 만들고, 아이들이 된다고 하면 그냥 영역없이 놀고...(사례 G).
교사들은 아동에 의해 시작되고 전환되는 것을 놀이의 주요한 특징으로 설명함으로써 아동의 주도성 담론을 내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동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포함하는 주도성 담론은 놀이라고 호명되는 일련의 활동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는 아동이 놀이를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놀이로 정의되는 일련의 행동과정 속에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아동이 드러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교사들이 누리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놀이에 대하여 아동의 주도성을 보여주는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어린이집에서의 아동의 활동을 관찰하여 ‘주도적인 아동’이라는 아동기 담론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교사들은 관찰을 통해 아동이 새로운 것을 시작하여 소위 놀이로 전환하는 지점, 아동들이 놀이 과정에서 새로운 규칙을 생성하거나 변형하는 지점을 아동의 주도성, 자율성으로 호명한다. 더 나아가 아동이 어떤 것을 시작하고 전환하는 것은 교사들에 의해 격려되고, 이는 아동의 행동규범으로 내면화될 수 있다. 또한 아동들이 특정 활동을 적극적으로 시작하고, 참여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자기계발의 원리를 영유아기부터 습득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교사들의 돌봄실천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아동기 담론의 두 번째 특징은 일상생활의 순간적인 경험이 놀이로 호명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놀이는 아동이 장난감을 매개로 활동을 하거나, 줄다리기, 달리기와 같은 신체활동, 소꿉놀이와 같은 사회극 놀이 등 소위 놀이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일련의 활동들을 의미한다(이종희, 2010; 서종원, 2015). 물론 일상적 사물의 새로운 응용을 ‘놀이’에서 배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접에 참여한 교사들은 일상적 활동이나 사물이 원래의 목적과 다르게 활용될 때, 이를 ‘놀이’라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교사들은 아동이 주변에 있는 사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을 놀이라고 하였다. 즉, 교사들은 아동들의 일상에서 접하는 평범한 사건들을 의미 있는 ‘놀이 경험’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한 교사는 아이들이 휴지 케이스에서 휴지를 뽑는 것을 좋아한다면 휴지는 놀잇감이 될 수 있고, 휴지뽑기는 놀이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다른 교사는 아이스크림을 닮은 사물을 보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흉내를 내는 것도 놀이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작년에 했던 것 중에서는 그니까 이전에는 바닥에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각티슈 해서 이렇게 휴지를 아이들이 뽑아요. 그러면은 사실 이거는 이제 사용 용도가 있잖아요. 휴지는... 그러니까 (과거에는) ‘이거는 놀잇감이 아니야’ 하고서 이제 위로 손이 닿지 않는 곳을... 위에 (휴지를) 올려주고, (다른) 놀잇감을 쥐어줬더라면 이제는 그 휴지로도... .이제 그게 놀잇감이 될 수가 있는 거죠.(사례 L).
아이들이... 영아들도 경험을 해야 하는데... 놀이법에 관심을 가지고. 어쨌든... 아이들이 만약에 아이스크림(을 닮은 사물)이 있을 때... 그거를 먹는 흉내를 내는 건 아이들 경험인거잖아요.(사례 F).
위에서 기술한 사례들에서 휴지는 더러운 것을 닦는 것에서 뽑아내는 것 혹은 손장난하는 것으로 사용목적이 변하였다. 어떤 사물을 보고 아동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처럼 흉내 내는 경험 역시 그 사물의 원래 목적과는 다르게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교사들은 이 사물을 원래의 목적으로 사용하게끔 유도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아동들이 그대로 행동하도록 허용하고 이를 ‘놀이’로 호명하였다.
교사들은 순간의 활동이나 스치듯 지나가는 일상경험에서 아동이 놀이를 했음을 발견해야 하며, 왜 이것이 놀이였는지를 판단하고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경험을 놀이로 호명하기 위해서 교사들이 아동의 일상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으며, 적절한 순간을 발견해 내야만 한다. 결국 교사는 아동들의 놀이를 발견하기 위한 관찰자가 되고, 일상경험이 어떻게 놀이로 호명되는지 설명하는 증인이 된다.
따라서 어린이집에서 아동이 보내는 일상은 작은 순간이라도 아동에게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경험으로 환원된다. 교사들이 어떤 순간을 놀이로 명명하게 되면 그 순간은 국가수준 커리큘럼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아동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험적 자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적 자원은 아동이 자율성, 창의성, 책임감 등을 발휘하고 실천하는 경험자본으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아동들의 어떤 활동이나 순간도 낭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교실 안에서는 블록을 쌓는다면, 밖에 나가서는 나뭇가지도 쌓을 수 있고... 여러 가지 활용할 수 있는 게 많고 정말 정형화된 어떤 장난감만 가지고 자동차 장난감은 이 자동차밖에 못하는데... 정말 나무토막 하면 자동차도 됐다가 비행기도 됐다가 벽돌도 됐다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으니까 밖에 나가서 놀면 오히려 더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사례 K).
이러하듯 일상적인 경험을 놀이로 포착하는 교사들의 언설은 시간낭비를 승인하지 않는다는 현대사회의 규범을 내포한다. 또한 놀이로 호명되는 일상경험은 사회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으로 여겨진다. 평범하게 지나갈 수 있는 순간을 놀이라고 호명함으로써 이를 의미 있는 경험으로 확장하는 효과가 있다. 즉, 이러한 놀이는 아동이 새로운 것을 시도했었던 순간이자 학습으로 획득한 지식이 아닌 경험을 통해 확장되는 암묵지로 이해함으로써 아동이 일상경험을 낭비하지 않는 자기관리의 주체로 여기는 규범을 형성한다.
앞서 교사들은 아동에 의해 시작되고 전환되는, 즉, 아동의 자율성이 드러나는 놀이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는 교사들은 ‘놀이’나 ‘아동중심주의’ 등의 개념을 아동의 자율성, 창의성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이들이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주요 담론인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이라는 담론을 내면화하고 아동돌봄에서 이를 실천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모든 아동은 스스로 놀이를 시작하고 전환하는 능력이 있는가? 그렇지 못한 아동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모든 돌봄 과정에서 아동이 자율적 존재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아동이 자율성이나 창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 놀이를 잘하는 아동 혹은 순조로운 놀이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일례로 교사들은 아동의 놀이가 복잡하며, 모든 연령대의 아동이 놀이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누리과정이 ‘놀이위주’와 ‘유아중심’을 표방하여 영유아 아동의 적극적 참여를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연령 아동, 특히 영아기에 해당하는 만 0세-2세 아동은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라는 아동기 담론을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만3세 이상에 해당하는 유아기 아동 역시 어린이집에서의 돌봄과 놀이를 통해 주도적인 아동이라는 담론은 아동이 지닌 문화경험과 의사표현이 충분한 아동이 더 적합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자율성과 사회성이 부족한 아동은 아동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보호자의 돌봄 문제로 환원한다. 이러한 점에서 아동기 담론에 적합하지 않은 아동들이 가시화된다.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교사가 보기에 주변에 흥미를 보이고, 교사들이 생각하지 못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아동은 아동기 담론에 적합한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아동이 된다. 이는 아동 개별의 특성처럼 보인다. 하지만 교사들의 설명에는 은폐되어 있던 ‘문화자본의 축적을 바탕으로 하는 아동‘이 드러난다. 교사들은 놀이를 잘 하는 아동의 공통점으로 아동의 기존 경험을 들었다. 즉, 경험이 많은 아동일수록 여러 가지 전환 놀이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러 경험을 했었던 아동일수록 놀이를 시작하고 다른 놀이로 전환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동의 경험은 가족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교사들은 가족과 캠핑을 해봤던 아동이 있으면 놀이가 훨씬 더 잘 진행된다고 하였다. 또한 비행기를 타보거나, 스타벅스에 가보거나, 마당이 넓은 집에 살아서 실컷 뛰어놀아보거나 하는 등의 경험은 아동들이 좀 더 쉽게 어린이집에서의 놀이나 활동에 몰입하거나 놀이를 매끄럽게 시작하게 하는 전제조건이 된다고 하였다. 이와 더불어 교사들은 집이 넓거나 ‘마당이 넓은 집’이라는 표현을 통해 경험이 많은 아동의 부모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다는 점을 강조한다.
평창동 집이 널찍널찍하고 마당 되게 넓은 집에서 사는 애들이 많았기 때문에... 근데 그 아이들이 경험은 더 많아요. 놀이는 경험이 많아야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왜냐하면 경험이 없는 아이들은 놀이가 안 돼요. 근데 비행기를 타본 아이들은 어떤 놀이를 해도 잘 이루어져요. 비행기와 관련된 놀이를 할 수도 있고, 자동차와 관련된 놀이를 하다가 비행기를 할 수도 있고. 기차가 될 수도 있고 되게 잘 이루어져요. 그거는 경험이 많아야... 경험을 잘 타는 거 같아요.(사례 F).
앞부분에서 기술한 아동에 의해 시작하고 전환되는 놀이, 혹은 놀이에 흥미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아동이라는 담론에는 아동이 얼마나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아동의 가정배경이 어떠한가는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누리과정에 나타나는 ‘자율성’, ‘창의성’이라는 단어는 아동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아동이 동등하게 습득할 수 있다는 에피스테메-진리를 구성한다(허경, 2012). 하지만 놀이를 잘 하는 아동, 놀이가 잘 되는 아동을 언급하는 교사들의 설명에는 어린이집에서의 놀이 이전에 경험이 많은 아동, 그리고 이 아동에게 많은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아동 가족의 사회경제적 베경이 드러난다.
어린이집 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아동과 그의 보호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이나 삶의 패턴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교사들이 파악하고 있는 개별 아동과 그의 가족에 대한 지식은 아동이 누구이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판단하고 예측하는 기반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교사들은 여행이나 여가부터 쇼핑 등 일상생활 경험이 많은 아동일수록 평범한 물건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고, 기존경험을 통해 새로운 놀이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게 된다. 즉, 교사들은 가족들과의 여행, 여가, 취미생활, 나들이 등의 경험은 아동의 문화자본의 차이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문화자본의 차이가 어린이집에서의 아동의 놀이능력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결국 교사들은 적극적이고 유능한 아동이라는 아동기 담론이 아동의 경제사회적 지위에 기반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누리과정에서 ‘유아중심’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아동중심주의는 현대사회의 아동기 담론을 나타나는 중요한 용어이다. 아동중심주의가 ‘아동에게 가장 적합한’ 혹은 ‘아동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상황과 환경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판단하는 것은 성인일 수도 있고, 아동 자신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하여 국가 수준의 커리큘럼은 영유아 아동을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닌 능동적인 ‘참여자’로 위치시켰다(Smith, 2012; Pechtelidis & Stamou, 2017). 개정된 누리과정에서는 지속적으로 교사들에게 다음의 것들을 강조한다. 아동이 흥미를 보이는 일을 개입하여 단절시키지 말 것, 계획 아동에 의해 변하는 것을 용인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동의 선택권을 강조할 것이다. 즉, 아동의 흥미, 아동의 놀이 실천, 아동의 선택이 중요하다(교육부·보건복지부, 2019). 즉, 아동의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면접에 참여한 교사들도 동일하게 표현한다. 교사들은 아동중심주의를 ‘아이들이 흥미가 있는 거를, 아이들이 직접, 스스로 선택하는 것’(사례 I)이라고 하였다. 아동은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참여하는 것을 아동중심주의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교사들에게 있어 아동의 흥미나 욕구, 즉, 아동이 그것을 원하는가는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이는 교사가 흥미를 유도한 후 아동이 잠시 흥미를 보이는 놀이와 활동은 오히려 아동의 몰입을 지속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인식과 맞닿아 있다(허정민, 이진희, 2019).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럼 아이들 입에서 나와야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지금 프로젝트처럼 질문을 하거나 아이들이 놀이에 관심을 가지거나, 그런 걸 다 해야 하는데...(사례 H).
이 지점에서 교사들은 아동의 표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사들은 아동이 무엇에 흥미를 보이는지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흥미가 지속되는지 없어지는지 끊임없이 파악하고자 한다. 아동의 흥미는 비언어적 표현으로도 파악할 수 있지만, 교사들에게 있어 아동의 흥미와 욕구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은 아동의 언어표현이다. 교사들은 아동들이 ‘무언가를 하고싶다’ 혹은 ‘좋아한다’는 말이 아동의 흥미와 욕구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므로 이룰 언어로 표현하도록 격려한다고 하였다. 또한 교사들은 아동의 의사표현 이후, 그것에 대해 반응해 주지 않으면 아동은 다시 표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아동으로 하여금 지속적인 의사표현을 하도록 유도한다고 하였다.
표현도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의 표현도... 아이들이 계속 활발하게 표현을 하니까 (아이들이 원하는 걸) 안들어주면 (표현을) 안하더라고요.(사례 G).
제가 이해하고 있는 아동중심은... 아이들이 요구하는 부분들을 캐치를 하고, 그거에 대해서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 그 아이가 존중이 되는 느낌이었어요. 그게 안 되면 아이들도 더 이상 표현을 하지 않으니까 교사가 민감성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사례 G).
아동의 흥미와 욕구를 표현하는 것, 그리고 아동의 의사를 반영한 활동의 전개는 어린이집 교사들이 해석하는 아동중심주의의 핵심이다. 자율적 존재로서의 영유아 아동이라는 개념이 아동중심주의라는 용어를 통해 전면에 드러나면서 교사는 아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 교사가 아동의 흥미와 욕구에 맞게 활동을 제공하지 않았을 때 아동의 흥미와 욕구는 감소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정확히 아동의 흥미 혹은 욕구감소라기보다 이를 위한 표현의 감소라 할 수 있다. 흥미나 욕구의 감소와 이에 대한 표현의 감소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표현의 감소를 아동의 흥미 혹은 욕구 감소로 인해 자율성이 발휘되지 못하는 상황으로 해석한다. 결국 교사들에게 있어 아동의 표현은 자율성 강화를 위한 주요한 수단으로 여겨지며, 아동에게 표현, 특히 언어 표현을 하도록 격려함으로써 아동으로 하여금 자기표현 증가라는 자기관리 기술을 실천하도록 한다.
아동기 담론에 적합하지 못한 아동의 문제는 부모-보호자의 문제, 즉, 가정에서의 문제로 환원된다. 교사들은 다른 아동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아동들의 자율성은 존중할 수 없다고 하였다. 아동들이 어린이집에 머무는 동안 일부 아동은 다른 아동들의 놀이를 방해하고, 폭력적인 감정을 보이거나 욕설을 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소위 유순함과 사회성이 부족한 아동의 자율성은 정상적인 자율성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러한 언설은 사회성과 규범을 지키는 범위에서의 자율성만이 인정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교사들은 아동의 사회성 부족이나 폭력적 감정 표현을 아동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고 가정환경의 문제로 인식한다.
예를 들어, 저는 이제 아이들의 자율성을 존중은 해주지만... 감정 조절이 안돼서 막 부순다던가... 욕하는 애도 있었고... 그냥 어떤 가정환경이 그대로, 이제 날 것으로 드러나는 애들.(사례 L).
아동의 의사표현 역시 아동 자율성의 일부로 여겨지는데, 의사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것 역시 아동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가정의 문제로 여겨진다. 의사표현이라는 행위 자체가 개인을 능동자로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아동의 의사표현은 아동의 주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이지혜, 2020). 교사들은 의사표현을 잘 하기 위해서는 가정 내 성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보호자가 아동의 의사표현을 잘 받아준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아동의 행동이 다를 수 있다고 하였다.
아동의 언어 표현의 차이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아동의 적절하지 못한 언어표현은 아동의 연령, 성격, 주변환경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결정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잘 양육하지 못한 문제로 환원된다. 어린이집을 통한 아동의 통치는 어린이집이라는 장치에서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학령기 아동의 통치가 학교-가정이 조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이집 역시 가정과의 조응을 통해 아동의 통치를 실천한다. 예컨대, 교사들은 다른 아동의 놀이를 방해하는 아동에 대해 부모에게 알리는 방식으로 적절한 아동의 행동을 유도한다. 결국 영유아 아동의 통치 역시 어린이집-가정이라는 이중 협력관계를 통해 나타난다.
V. 결론
이 연구는 푸코의 통치성에 기대어 어린이집에서의 돌봄을 통해 현대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논리가 아동돌봄에도 적용되고 있으며, 현대사회의 주요한 아동담론으로 실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은 ‘놀이위주’와 ‘유아중심’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아동을 영유아 아동기 담론의 핵심내용으로 담고 있다. 아동은 놀이를 통해 자율성을 경험하고 책임감을 배우는데, 이 과정에서 과거와 달리 스스로 결정하는 아동이라는 표상(表象)이 부각된다. 이와 더불어 성인인 교사는 아동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기보다 아동의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도록 한다.
한편, 교사들은 국가수준의 커리큘럼을 해석하고, 실제로 영유아 아동을 돌보며 아동기 담론을 실천하는 역할을 한다. 교사들은 ‘놀이’와 ‘유아중심’이라는 단어를 돌봄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아동이 일상적인 사물을 다르게 인식하고 놀이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아동이 스스로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동의 자율성을 발견하기 위해 교사들은 끊임없이 관찰하고, 작은 사건이나 활동도 주요한 경험으로 의미화한다. 즉, 교사들은 아동이 지속적으로 아동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도록 하는 자기관리기술을 유도한다.
아동의 자율성은 중립적이며 개별적인 용어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이는 아동의 개별적인 특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교사들은 아동이 가정에서 경험하는 문화자본의 차이가 놀이를 응용함에 있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이와 더불어 아동중심주의는 아동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가, 아동이 흥미를 표현하는가에 치우쳐 있다. 따라서 교사들은 아동에게 자기표현, 특히 언어표현을 강조하게 되고, 아동중심은 표현의 강조로 이어지게 된다. 이와 더불어 아동기 담론에 적합하지 아동, 즉, 사회성이 부족하고 폭력적인 감정을 내보이는 아동은 아동 개별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아동의 가족문제로 환원함으로써 어린이집과 가정의 조응을 통해 아동기 담론에 적합한 아동으로 주조할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결론적으로 자율적 아동으로 주조하는 아동의 통치는 아동돌봄제도, 어린이집, 교사, 부모, 가정 등 다양한 장치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대사회에서 자율적 아동으로 대표되는 영유아 아동기 담론과 담론실천과정에서 드러나는 아동의 범주화는 자기계발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아동화되어 나타남을 보여준다. 이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자율적인 아동이라는 영유아 아동기 담론은 어린이집이라는 장치의 등장으로 놀이와 아동중심주의라는 교육학, 아동학 등에서 사용하던 단어로 새롭게 재구성된다. 이는 학령기 아동, 청소년기 아동 등 아동의 생애주기에 따라 드러나는 관련 제도나 정책 등은 달라지지만, 창의성, 유연성 등의 핵심 단어들을 공유하며 자기계발하는 인간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라는 맥락에서 변주된 형태로 나타난다.
둘째, 아동기 담론은 교사들의 돌봄실천을 통해 아동을 어떤 존재로 주조할 것인가가 세밀하게 드러난다. 우선 교사들은 아동이 놀이를 스스로 시작하고 전환하는 것, 규칙을 만드는 것 변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교사들의 인식은 어린이집이라는 특정 장에서 아동에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도록 격려함으로써 아동의 행동규범으로 내면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더불어 교사들은 아동중심주의를 아동의 흥미로 환원하고, 이를 아동의 언어표현을 통해 파악한다. 따라서 교사들은 아동의 흥미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자율적 아동 혹은 주도적인 아동이라는 아동기 담론은 교사들의 돌봄 실천을 통해 아동들에게 다양한 행동규범으로 전달된다.
셋째, 어린이집이 아동 생활공간의 새로운 장으로 등장했음에도, 아동의 통치는 어린이집에서 뿐 아니라, 가정과의 협력을 통해서 실천된다. 교사는 아동기 담론에 적합한 아동이 아동의 개별적 특성으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한다. 놀이를 잘 하는 것은 아동의 문화자본으로 아동의 사회성 등으로 놀이에 잘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가족 내 보호자의 문제로 환원한다. 교사들은 부모와 협력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린이집에서의 아동의 상황을 부모에게 전달함으로써 가족 역시 아동기 담론의 실천자가 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아동기 담론의 실천이라는 점에서의 아동의 통치가 하나의 장치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장치들을 통해 복잡하게 수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